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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평화,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칼럼]평화, 다시 상상력에게 권력을

기사승인 2019. 11. 2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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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인류학자들은 신석기시대를 혁명적인 ‘사건’으로 인식한다. 지금으로부터 일만 년 전, 인류는 ‘정착’이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흔히 모험은 여행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그 뉘앙스가 떠돌아다니는 유목인들의 삶과 맥락을 같이하기 마련인데, 그와 반대 개념인 ‘정착’이 ‘모험’이라고 하면 얼핏 형용모순처럼 비춰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곳에 안착하는 정주가 ‘사건으로서 도전’이 됐던 이유는 미래라는 ‘불확실성’의 극복에 있다. 인류가 특정장소를 택해 과감히 그곳에 머물게 된 것은 추론이라는 상상의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고 예측할 수 있게 되면서 궁극엔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과잉돼 정주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 과정 중에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을 터이다. 예상을 벗어나 곡식이 싹을 틔우지 않거나, 수확직전에 자연재해로 한순간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 다가오는 겨울을 버틸 수 없는 날들이 연속되고 불안과 공포에서도 마침내 살아남은 이들은 정주의 삶을 완성한다. 이로써 인류는 생태계의 적자로 선택받게 됐다.

아프리카발원지에서 시작된 생존을 위한 인류의 긴 여정은 땅이 있는 곳이라면 거의 대부분 지역에 발자취를 남겼다. 온화한 환경과 초지가 발달된 지역을 관통하고, 밀이 싹을 틔우고 성장하고 다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지켜보며 인류는 그들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쩌면 인류가 밀의 구애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초목(草木)들 간의 치열한 햇볕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힘없는 풀인 밀은 인류에게 양식을 제공하며, 한해살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DNA를 안정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매개자로 인류를 선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끊임없이 페르몬을 뿜어대며 필요이상 열매를 맺어 인류에게 나눠주고 공존을 제안했다는 상상은 과학자들만의 몫은 아닌 것 같다.

인류는 일만 년에 걸친 정착을 완성한 후 이제 다시 유목을 꿈꾸고 있다. 디지털시대와 유목주의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제 물질은 생명을 매개하지 않고도 스스로 역동적 흐름의 고리에서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듯싶다. 알고리즘을 단순화하고 모든 연산이 의지와 상관없이 욕망으로 작동하는 순환의 고차방정식은 인간의 능력너머에 가 있다고 한다.

사실 오랜 기간 정착은 구조적 모순을 가져왔다. 곡물의 잉여를 통해 계급계층사회가 만들어지고 부족과 부족, 나라와 나라, 제국과 제국 사이에 경계가 만들어졌다. 역동적 순환의 고리에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의지와 동력을 가지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낸 물질의 입장에서 순환을 막는 모든 경계는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장애이며 디지털코드에 발생한 버그에 불과할 뿐이다.

디지털유목의 시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는 상상을 해본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철조망을 걷어내고 두꺼운 콘크리트장벽을 부수고, 아무런 제지 없이 한반도의 북쪽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유목을 떠나는 상상을 해본다. 한반도의 남북에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한 도로가 연결되고, 서로 반목 없이 상호간의 체제를 존중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의 서쪽 끝, 칼레에 가보고 싶다.

작금의 꽉 막혀 보이는 남북미관계, 동북아시아의 요동치는 정세가 불안하고 그 미래가 불확실해 보임에도, 평화라는 상상력에 권력을 돌려주고 이제 벽으로 둘러싼 고립과 정주를 끝내고 유목을 실천하는 꿈을 꿔본다. 그게 디지털시대를 선도하는 대한민국의 격에 맞지 않을까?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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