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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젠더이슈에 대한 단상

[칼럼]젠더이슈에 대한 단상

기사승인 2019. 12. 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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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나는 내 나이와 젠더에 대해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정치에 입문한 이유와 우리가 유권자의 신뢰를 얻었던 것들을 생각한다.” 포털에서 이슈가 된, 핀란드 차기 총리 예정자가 한 말이다. 핀란드 제 1당 사민당 신임 대표로 당선된 산나 마린은 의회의 승인절차를 거치면 핀란드의 내각을 이끄는 총리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녀는 34살로, 정계의 수장으로선 매우 젊은 나이다. 게다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경제적 약자를 대변할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라고 매체는 전한다. 그러나 마린은 특정 계급과 연령 혹은 성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천명한 대로 ‘우리라는 유권자들’을 위한 연대의 정치를 선언했다. 멋진 연설이 아닐 수 없다.

위의 기사를 접하며 떠오른 단상이 있다. 지난 11월, 대학 캠퍼스는 선거운동으로 번잡했다. 건물입구마다 총학생회, 단과대학생회, 과학생회 후보들이 난립(?)해 재학생들에게 투표를 독려하고 자신들의 공약을 어필했다. 대학가는 모처럼 활력이 넘쳐보였다.

사실 봄, 가을로 열리는 대학축제는 연예인콘서트로 변질된 지 이미 오래인 듯싶다. 꼰대가 되어가는 필자의 입장을 숨기지 않고 말하자면, 축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선거만큼은 여전히 신선해 보였다. 청춘들이 자신의 캠퍼스라이프를 주도적인 방식으로 집행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에서 그렇게 참여의 방식을 배워나가는가 싶어 좋아 보였다.

선거기간엔 강의실 분위기도 바뀐다. 세미나 형식의 작은 규모의 수업은 체감지수가 더 높다. 후보자로 나서거나 선거운동을 돕는다는 이유로 2~3주간 특정학생들이 장기결석을 한다. 사실 이런 모습이 새삼스럽진 않다. 이 맘 때면 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뀐 것도 있다. 선거운동을 하는 학생들이라도 총장이 허가한 사유의 공결확인서를 제출하는 등 적극적으로 출석체크를 한다. 아무래도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하는 청춘들에겐 학점관리가 중요한 포인트인 듯싶다. 진도를 못 쫓아올까봐 별도로 수업자료를 챙겨주기도 하고 리뷰를 쓰게 하여 수업을 대체하게 한다. 선거와 투표라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기에 출결에 불이익이 가지 않게 함이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기말시험결과를 확인해 보면 영향이 없진 않다. 여하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발적인 참여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그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올해 불쑥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정후보 김OO, 부후보 최OO VS 이OO 박OO’란 이름이 박힌 선거포스터에는 예의 왼쪽엔 남학생이, 오른쪽에 여학생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초등학교에서부터 바뀌어 가는 정, 부후보의 성역할이 새삼 대학에서 회귀하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필자가 대학 강단에서 보아온 학생들의 분위기는 이미 상당히 바뀌었다고 생각해 왔다. 여성, 남성 혹은 후배, 선배의 뚜렷한 차이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고,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성대결은 극단의 경우일 뿐이며, 이제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갈등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선거를 보면서 섣부른 결론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나시간을 빌어, 왜 정후보엔 남학생이, 부후보로는 여학생이 나서는지 그 이유에 대해 몇몇 학생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필자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정후보로 나선 남학생들은 군대에 다녀온 복학생들이었고 여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부후보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서너 살 차이는 크게 느껴진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동안 점차 나이가 기준이 되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만, 성인임에도 아직 학생신분인 대학생들에게 나이는 여전히 중요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부터 남녀 간의 사회적 역할 차이가 부여되는 중요한 지점일수도 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부조리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 다시 질문해 보았다. 우문현답이랄까. 학생들의 대답을 가공해 정리해 보면, ‘나이(Age)라는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성차를 발생시키는 차별을 없애는 방법은, 허위의식을 깨는 의식의 전환에 앞서 그 차별을 낳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맞다싶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남학생들이 군대에 가지 않지 않게 되면 나이차가 기준이 되는 불합리를 극복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현실에 맞지 않았다.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지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지 않나하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성들에게도 남성들과 똑같이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대한 저항감이 만만치 않을 수 없다.

여성들이 병역을 의무로 하지 않은 것은 남성보다 근력이 부족하다는 신체적 차이보다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역할이 크기에 병역에서 제외된 것인데, 여성에게 병역까지 지게 하는 것은 과하다 못해 부당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성이 병역의 의무(여기서 병역의 의무라 함은 광의의 사회적 영역의 봉사에 복무함을 의미한다)를 지게 된다는 가정 하에,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결혼하게 되면 반드시 그 배우자는 아내가 출산한 이후에 의무적으로 육아를 담당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다면 배우자 없이 출산하는 경우는? 학생들 중 일부는 그 경우엔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한다고 강하게 어필했다. 또한 지극히 마땅한 말이다. 공교롭게도 전하는 뉴스에 따르면 마린 역시 가난한 편모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변화와 변혁이 만만치 않은 일임이 분명해 보이나, 우리에게도 나이와 젠더, 계급계층을 극복한 핀란드의 총리지명자 마린과 같은 지도자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학생들과 나눈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보고서처럼 쓰고 있는 이 칼럼에서 정책 당국이 아이디어를 찾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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