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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가디언은 누구인가!

[칼럼]가디언은 누구인가!

기사승인 2019. 10. 1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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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가디언, 직역하면 ‘보호자’다. 영상연출에 탁월한 감각을 선보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수작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년 작)’엔 ‘알레한드로’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이 등장한다. 알레한드로는 멕시코 전직 검찰 출신으로 멕시코 마약카르텔 소탕목적의 CIA 작전에 전격 투입된 비밀요원이다. 알레한드로는 알렉산더의 스페인식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가디언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내아이에게 부여되는 백인 남성중심주의의 가부장적 바람이 담긴 표현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란 기표 이면엔 부정적 기의가 숨겨져 있다.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대왕에겐 항상 ‘잔혹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영화적 내러티브의 담화엔 곧잘 무자비한 보호자란 양가적인 캐릭터에게 부여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지옥의 묵시록’으로 유명한 마틴 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가디언(The Guardian 1984년 작)’ 텔레비전 영화에서도 특별한 보호자가 등장한다. 영화의 내용은 흥미로우면서 섬뜩하다. 변호사인 주인공 찰리(마틴 쉰 분)는 고급 아파트로 이사 온다. 하지만 곧 빌라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사소한 범죄사건을 계기로 주민들이 채용한 경비원(가디언) 존에 의해 주거지는 철저히 통제된 공간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직무에 충실한 가디언 존에게 주민들은 지나치리만큼 고분고분하며 그를 과도하다 싶게 신뢰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그들의 고용인인 가디언 존에게 넘긴다. 이같은 점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찰리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지적하고 따져 묻는다. 그러나 그럴수록 주민들은 찰리를 멀리하고 따돌릴 뿐이다.

찰리가 문제를 제기할수록 존이 해결해야 할 치안사건은 더욱 많이 발생한다. 가디언이란 위상에 걸맞게 경비원 존은 능숙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주민들 위에 있는 통제자의 면모를 보인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한편의 우화를 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우리 사회가 관통한 군부독재 시절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어떤 권력기관의 폭주가 연상되기도 한다.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권석징악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명백한 증거로 경비원의 비리를 밝힌 찰리는 존을 쫓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찰리는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우여곡절 끝에 경비원 존은 다시 빌라에 고용된다.

복직된 존은 전보다 우아한 방식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고 그들 위에 확고하게 군림한다. 존의 도움을 받아 목숨이 위태한 위기를 모면한 찰리 역시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의 응시로 끝을 맺는다. 어떤 사소한 일로 문득 찰리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이 조작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서스펜스구조 영화의 내러티브를 쫓아가던 관객은 존의 비위 사실을 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찰리의 눈빛을 마주할 뿐 막이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극장의 아이러니에 빠지는 순간이다. 응시를 통한 찰리의 질문에 관객은 답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찰리가 빠진 상황은 곧 우리 자신의 처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찝찝한 뒤끝과 함께 우리는 침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받게 된다.

사실 존이란 이름엔 익명의 피의자란 의미가 내포돼 있다. 미국에서 통계적으로 잡범혐의로 잡혀 온 이들이 대충 둘러대는 가명 중 가장 흔하게 사용된 이름이 존이라고 한다. 피의사실보다 현재의 수치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익명에 숨으려는 심리가 깔렸다고 한다. 익명의 심리는 집단에 숨으려는 심리이다. 집단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동일체란 의식은 잠재적 거악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가공할 위험요소이다. 그것이 권력기관에서 일어난다면 그 자체로 이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소개한 영화 ‘시카리오-암살자의 도시’로 돌아와, 주요캐릭터인 알레한드로는 마약카르텔에 처와 딸을 잃은 사적 복수를 수행하고자 스스로 악이 된 인물이다. 그는 CIA건 미국 정부와 은밀하게 연계된 콜롬비아 카르텔 메데인 등 가리지 않고 그들을 돕는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에게 위해를 끼친 멕시코 소르노 카르텔을 와해시키고 하수인과 우두머리 그리고 그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그런데 어딘지 통쾌한 복수극이란 생각이 들기보단 끔찍한 생각이 들게 한다. 그 복수극엔 어떤 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힘의 정의를 부르짖는 미국중심의 수평적 질서이다. 영화에선 그 구조를 지탱하는 힘은 구조 자체가 메시지인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 의식과 더불어 권력기관이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역시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의 간에 벌어지는 작금의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서 스스로 가디언이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 네 편 내 편을 가르자는 게 아니다. 어쩌면 누가 누구와 잤느냐의 문제와 다름이 아니다. 이제 누가 누구를 위한 가디언인가 따져 물어야 할 때가 된 듯싶다. 왜곡된 가디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란 말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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