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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피터와 밴’, 자연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재고(再考)

[칼럼]‘피터와 밴’, 자연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재고(再考)

기사승인 2020. 09. 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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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2005년 EBS가 주최한 다큐멘터리페스티벌에서 소개된 단편다큐멘터리영화 ‘피터와 밴’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단편다큐의 호흡상 십여 분의 짧은 시간이지만, 그 속에 완결된 ‘에피소드’를 담아내고 여운과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한 초로의 남자가 사람이 살지 않는 스코틀랜드의 오지(奧地)로 들어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문명에 지치고 물질주의에 치인 주인공 ‘피터’는 인적이 없는 땅을 찾아 거처로 삼는다. 말하자면 영국판 ‘자연인’이다. 어느 날 길 잃은 양(羊) ‘밴’이 그를 찾아온다. 먼 거리에 위치한 목초지에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밴에게 피터는 동질감을 느낀다. 자신 역시 무리로부터 이탈된 존재이기에 밴에게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얼마 동안 이들의 동거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홀로 지내던 피터에게 밴은 조용히 소요(逍遙)할 시간을 빼앗는 시끄럽고 거추장스런 불청객일 뿐이었다. 피터는 주저 없이 밴을 양떼무리에게 돌려보낸다. 고요한 바람에 숨죽여 우는 수풀, 그 속에 자신을 맡기고 온전한 사유(思惟)를 만끽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저녁이면 막무가내로 따뜻한 보금자리를 찾아 문을 두드리는 놈이 돌아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터의 예상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밴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피터는 좋은 징조라며 다행이라 여긴다. 자신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녀석이 무리를 찾아 돌아간 것이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피터는 진정 밴을 걱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밴이 무리에 귀환한 것에 피터는 내심 상처를 입는다. 좋은 일이라고 연신 되뇌는 그의 말꼬리엔 아쉬움이 걸려있다. 얼굴표정 역시 전혀 밝지 않다. 사실 피터는 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다. 고향의 노모가 자식들에게 이번 명절엔 오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뉘앙스로는 반드시 와줄 것을 전하는 마음을 콘셉트로 한 통신사 광고도 있지 않았던가. ‘잘된 일’이라고 반복하는 말속엔 다른 바람이 담겨 있다. ‘서사학(내러톨로지)’에서는 이를 ‘서브텍스트’라고 한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배치되는 마음상태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중의적 혹은 반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의 끝은 밴의 귀환으로 마무리된다. 놈은 무리에 돌아가지 않고 피터에게 돌아온다. 밴과 피터의 우정, 가슴 먹먹하게 바라보게 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볼거리와 얘깃거리가 풍부한 한편의 ‘콩트’ 같은 다큐멘터리영화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한 편의 알레고리로 볼 필요가 있다. 피터는 밴을 보냈다가 다시 맞이한다. 틀린 표현이다. 철저히 피터를 중심으로 한 사유방식이다. 피터(Peter)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으로, ‘반석’으로서 아버지를 의미한다. 한편 아버지의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네버랜드(Never Land)를 찾아가는 다큐의 주인공은 피터 팬과 닮아있기도 하다. 또한 밴(Ban)은 히브리어로 아들을 뜻한다. 물질문명에서 자연 속에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피터는 여전히 자신(인간)을 중심으로 대상세계로서 자연(아들 밴)을 바라본다.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공존방식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된 용어가 생태(eco)다. 기존의 환경(environment)이라는 말은 ‘자연을 인간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둘러싼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태도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반성에서 생태주의는 시작됐다.

그러나 피터의 태도에서 엿보듯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다룬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부를 수 있고 돌려보낼 수도 있는 대상세계 쯤으로 여긴다. 환경에서 생태로 말을 바꾸었어도 인간을 중심으로 유불리(有不利)를 따지는 한 자연의 반격을 피할 수는 없다. 아니 이 또한 수정돼야 할 표현이다. 자연은 화내는 법이 없다. 스스로를 치유하고 정화함으로써 세계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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