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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기업의 인권과 환경보호 의무, 과반 실패 부결

스위스 기업의 인권과 환경보호 의무, 과반 실패 부결

기사승인 2020. 11. 3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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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명운동으로 시작되어 2020년 국민투표로 발의된 안건
득표 수 전체로는 승리했으나 각 주별 투표로 과반 넘지 못해
스위스 내 주별 과반을 넘지 못해 통과하지 못한 두 번째 투표안건으로 남아
남미 카카오 농장에서 불법 아동노동으로 착취를 당하는 소녀. 그 소녀가 딴 카카오는 스위스 기업에 의해 가공되어 전 세계로 판매된다. 이 소녀는 대체 어디에 자신의 인권침해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물어야 할까?

switzerland voting
투표 막바지까지 이니셔티브 찬성파와 반대파의 열띤 공방이 이뤄졌다. 찬성파는 아동노동의 피해 소녀를 포스터로 내걸었고, 반대파는 스위스의 국민영웅 빌헬름 텔을 캠페인 포스터에 걸었다. (Photo by Fabrice COFFRINI / AFP)/2020-11-30 00:13:18/<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29일(현지시간) 진행된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기업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사회책임을 요구하는 발의안이 과반 이상 득표하는데 실패했다. ‘기업책임 이니셔티브(Responsible Business Initiative)’ 라고 알려진 이 발의안은 스위스에 기반한 기업들의 인권과 환경보호 기준 준수 의무책임을 헌법 개정을 통해 명시하도록 하는 발의안으로, 그 책임 범위는 스위스 자국 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벌어지는 모든 기업활동까지 포함한다. 2015년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2020년 국민발안 안건으로 정식 등록되어 열띤 논의 끝에 스위스 전역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번 투표는 득표 수로만 따지면 찬성 50.7% 반대 49.3%, 37,500 표의 차이로 찬성이 더 많았다. 하지만 각 주별 투표결과에서 찬성 8.5, 반대 14.5 로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국민발안의 발의안은 인구(popular) 투표와 주(canton)별 투표 모두 과반을 해야 통과된다. 이로써 인구 투표에서는 성공했지만 주별 투표에서 과반을 넘지 못해 통과하지 못한 아쉬운 발의안으로 남게 되었다.

지역별로 보면 스위스 서부의 프랑스어 사용지역인 제네바, 보, 유라, 프리부르, 뇌샤텔 주와 남부의 이탈리아어 사용지역인 티치노 주, 북부 지역인 취리히 주에서는 최대 68% 이상의 찬성표를 얻으며 이 발의안을 지지했다. 하지만 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크, 루체른, 바젤, 상갈렌, 아펜첼과 같은 지역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지난 5월에 실시된 사전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약 78%가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던 결과와는 사뭇 다른 결과이다.


◇ “법적 재제가 없다면 아무도 지키지 않을 것” VS “비용/책임 부담으로 기업 타격, 스위스 경제 곧 휘청할 것”

스위스 의회에서나 시민사회에서 수년 간 팽팽한 논쟁이 있었던 안건이니 만큼, 투표를 앞둔 지난 몇 주 동안에는 특히 찬성파와 반대파 양측 간 공격과 비난이 더욱 거세졌다. 찬성파의 캠페인 포스터에는 아동노동의 피해자로 보이는 한 소녀의 사진을 사용하여 유권자들에게 감정적 호소를 하기도 했다. 또한 전국적으로 퍼진 시민 찬성지지자들을 중심으로 “YES” (지역에 따라, ‘Si, Oui, Ja‘라고 적힘) 라고 쓰여진 주황색 깃발, 엽서 및 광고판을 도심과 주택가 곳곳에 내거는 풀뿌리 운동이 진행되었다. 더불어, 아동노동과 인권 침해, 그리고 환경 파괴 문제로 논란이 되어 온 특정 기업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왔다. 전 세계 1위 코발트 생산회사이자 거대 광물기업인 글렌코어 (Glencore), 대규모 농업 기업인 신젠타 (Syngenta), 시멘트와 콘크리트 등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라파지홀심 (Lafargeholcim), 그리고 세계적인 식품업체인 네슬레 (Nestle)가 그 대표적 타깃이었다. 이렇게 직접 언급된 기업들은 지역신문에 한 쪽 전체 광고를 게재하거나 트위터 게시물을 통해 환경과 인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 직접 해명하며 나서기도 했다.
switzerland voting campaign
기업책임 이니셔티브를 찬성하는 뜻의 “YES!” (Si/Oui/Ja) 가 적힌 주황색의 현수막이 스위스 곳곳에 걸려있다. (Photo by Fabrice COFFRINI / AFP)/2020-11-25 18:28:22/<저작권자 ⓒ 1980-2020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결과적으로는 반대파가 만들어낸 ‘경제적 불확실성’에 많은 표가 간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다국적기업, 주요 산업 로비협회, 무역/기업연맹과 우파정당 지지자들로 이뤄진 반대파는 이 발의안이 수많은 스위스 기업과 스위스 내 다국적 기업뿐 아니라 더 나아가 스위스 경제 전체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은 ‘이니셔티브의 기본적인 비전과 목표에는 적극 동의하며 우리의 목표와도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대신 ‘그 목표에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여 도달하는가’에 대한 관점이 다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동일한 이해와 가치공유를 내세우며, 이미 많은 스위스 기업들은 스위스 뿐 아니라 기업이 활동하는 전 세계 곳곳에서 각 국가의 인권과 환경보호 기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리는 데 힘써왔다.

하지만 ‘현지 원재료 공급체계를 포함하여 모든 기업활동의 과정을 대상으로 법적구속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너무 광범위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널리 알려진 다국적 기업인 네슬레 (Nestle), 라파지홀심 (Lafargeholcim), 노바티스 (Novartis)의 임원들은 현지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업의 통제범위를 넘어서는 행위에 대한 법정 소송에 대한 우려가 크다‘고 밝혔다. 그렇게 될 경우,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비용과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어떤 기업이 고 위험 국가에 투자를 하려고 나설지 그 여부가 불투명‘하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이런 다국적 기업들은 해외 고 위험국가에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고 지역사회에서 이익을 나눌 수 있도록 재투자와 기부활동을 함으로써 공동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투표 막바지까지 감정적 호소를 해왔다.

현지 매체 보고에 따르면, 이 발의안의 반대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기 위해 한화로 약 97억 5천만 원(현지 통화 기준 800만 프랑(CHF))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비용이 많이 쓰인 캠페인으로 기록된다.


◇ 의회가 제안한 대안법안은 국민발안 이니셔티브와 어떤 차이가 있나

지난 2011년 세계연합(UN)은 ‘기업과 인권이행원칙(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을 발표하였다. 전 세계 회원국 기업이해관계자들이 인권존중을 기업전략의 핵심으로 삼아 기업 시스템과 모든 활동에 그 원칙을 적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에 스위스는 이 지침을 국가실행계획으로 채택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업들을 대상으로 인권과 환경보호 기준을 준수하는 것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는 않았다. 이 때부터 시민사회기구의 연합체, 교회단체, 인권단체와 노동조합, 그리고 좌파 정당의 지지자들이 모여 국민발안투표에 이르기까지 거의 10년 이라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온 것이다.

이 오랜 역사를 가진 발의안은 국민투표로 통과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의회에서 구성한 대안법안이 자동적으로 발효될 예정이다. 하지만 의회가 제안한 대안은 기업책임 이니셔티브의 찬성 지지자들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찬성파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법적 책임 조항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차이점 표
의회의 대안법안과 29일(현지시간) 국민발안투표가 진행된 기업책임 이니셔티브의 주요 차이점을 간략히 요약했다. /제공= 박수정 베른 통신원.
그 외에도 의회에서 논의된 대안법안에는 여러 차이점이 있다. 예를 들면, 직원 250명 이상을 고용하거나 고 위험 산업군의 모든 중소기업을 포함하는 발의안과 다르게 대안법안에는 오직 대기업으로 대상을 한정했다. 또한 발의안에서는 자회사는 물론 경제적 통제권 내의 모든 기업까지 스위스 기업의 법적 책임범위로 두는 반면, 대안법안에서는 오직 법적 통제권 내의 자회사로만 그 책임범위를 규정한다. 스위스 기업이 소유하지 않은 기업이라면 인권과 환경보호 책임 범위 바깥에 놓여지는 것이다.

기업책임 이니셔티브의 발의위원회 공동의장이자 인권 전문가인 딕 마티 (Dick Marty)는 현지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늘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내일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이 발의안을 중심으로 구축된 운동이 단순히 투표결과로 인해 끝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국민투표는 실패로 끝이 났지만 의회의 대안법안 실행을 위해서도 많은 부분이 여전히 논의 되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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