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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사도세자 후손들은 절손의 아픔을 겪는다

[기고]사도세자 후손들은 절손의 아픔을 겪는다

기사승인 2021. 05. 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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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박정해 한양대 동양문화학과 교수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자손의 번창과 왕실의 안녕을 바라던 정조는 사도세자 무덤을 이장하는 것으로 해결코자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심혈을 기울여 입지를 선정하고 조성한 융릉은 절손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연출하고만 것이다.

흔히 풍수에서는 묘소의 이장 후에 태어난 자손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한 후에 태어난 문효세자는 요절했고, 순조도 효명세자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헌종도 후사가 없어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자리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사도세자는 3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은언군과 은신군, 은전군이 그들이다. 이들조차도 원만한 후계를 이어가지 못했다.

은언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대부분 양자로 대를 이었다. 서자인 전계대원군만이 3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이 또한 원만하게 대를 잇지 못하고 양자를 들였다. 전계대원군의 서자인 철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는데, 그 또한 후손 없이 죽었다. 이를 통해 철종은 사도세자 서자의 서자의 서자라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은신군의 양자로 들어온 남연군은 인평대군의 6세손으로 왕족이라 할 수 없는 상태였으나, 양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왕족의 신분이 됐고 후에 고종이 등극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융릉
사도세자 융릉의 모습.
사도세자 후손의 절손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모두 묘지 풍수만으로 야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부인할 수 없는 일정한 현상은 확인된 셈이다. 세상사의 모든 것이 묘지 풍수만으로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련의 현상들로 인해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며, 정조의 노력에 심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대신들의 농간이라는 음모론에 대해서도 반박하기 어려운 구실을 제공하고 있다. 시신을 안장할 지점을 정하는 재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신들의 농간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재혈하는 과정을 정조가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닌, 전적으로 보고에 의지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크다. ‘홍재전서’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본인이 직접 확인하지 않은 상황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 가계도
사도세자 가계도.
사도세자의 융릉은 정조의 바람과 달리 혈에서 벗어난 재혈이 이루어졌다. 본인이 직접 풍수를 공부하고 ‘천재일우’의 명당을 찾았다고 기뻐했으나 결과는 참담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는 여러 이유와 상황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본인이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닌 신하들의 보고에 의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왕릉 조성과정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한데, 대신들의 음모가 반영될 여지가 많았다는 점은 부인키 어렵다.

또 다른 이유로는 현장풍수가 갖는 다양한 요인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론서만으로 공부한 한계를 보이는 것인데, 책상풍수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융릉의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이론서와 현장학습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며, 각각의 특징적인 의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만, 비로소 완성된 풍수가 현실 속에 투영될 수 있다.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사도세자의 무덤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박정해 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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