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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탄압에 맞선 월주스님...세간에서 깨달음 구한 승려

신군부 탄압에 맞선 월주스님...세간에서 깨달음 구한 승려

기사승인 2021. 07. 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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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개혁 앞장·사회운동 족적…총무원장 3선 무리수·'나눔의집' 사태 오점
월주스님 출처 금산사 홈페이지
월주스님./출처=금산사 누리집
22일 전북 김제 금산사에서 입적한 월주스님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세상과 종단이 어려웠을 때 그 중심에 서 함께 했다.

1980년 40대 나이에 조계종 총무원장에 선출된 그는 청정 비구의 정신을 바탕으로 종단 갈등 해소와 화합에 나섰다.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국가 권력의 간섭을 배제했던 그는 12·12사태 등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로부터 지지 선언을 요구받았으나 단박에 거부했다. 대신 5·18민주화운동이 전개된 광주를 찾아 다친 시민을 위로하고, 희생자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봉행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던 상황에도 자비행을 실천한 것이다.

불교계를 손볼 날을 꼽았던 신군부는 그해 10월 27일 전국 사찰 곳곳에 군홧발로 들어가 스님들을 폭행하고 잡아 가두고 고문을 가했다. 이른바 ‘10·27 법난’으로 기록된 신군부 탄압을 월주스님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았고, 총무원장직에서 사실상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다.

스님은 신군부 탄압에 떼밀려 떠난 해외 구도의 길에서 한국 불교의 미래를 성찰한 것으로 회고된다. 그는 여정을 통해 세간에서 불법을 찾고 대중과 공존해야 한다는 결론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답은 ‘깨달음의 사회화운동’이었다.

그가 2016년 낸 회고록 ‘토끼뿔 거북털’이라는 제목에는 스님의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토끼뿔 거북털은 육조 혜능 대사의 육조단경에 나오는 ‘불법재세간(佛法在世間) 불리세간각(不離世間覺) 이세멱보리(離世覓菩提) 흡여구토각(恰如求兎角)’이란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불법은 세간 가운데 있으니 세간을 떠나서 깨닫지 못하고, 세간을 떠나서 깨달음을 찾는다면 마치 토끼에게서 뿔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렇게 불교의 사회운동으로 선회한 그는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를 시작으로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1990∼1995),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대표(1996) 등을 맡으며 운동 전면에 나섰다. 이웃종교와 함께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던 그는 당시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와 함께 시대가 필요로하는 종교의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1994년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 강행에서 비롯된 종단 폭력사태로 조계종 개혁회의가 출범하자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두 번째 총무원장에 올라 종단이 제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이끌었던 일은 지금도 종종 회자되는 일이다.

그는 1998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집’을 설립했고, 2004년에는 국제개발 협력단체인 지구촌공생회의 문을 열었다.

그는 68년을 승려로 살아오는 동안 불교계 큰스님으로 따르는 이가 많았으나 한편으로는 마뜩잖게 보는 이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선 연임을 강행하다 쫓겨난 전임 총무원장의 전철을 밟듯 스님은 1998년 3선 연임에 나섰다가 종단 폭력사태의 빌미가 되며 자신은 물론 종단에 큰 오점을 남겼다.

자신이 설립해 20년 넘게 이사장을 맡아 활동했던 ‘나눔의집’ 후원금 유용 논란은 노승을 뒷방으로 물러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그의 관련성 여부를 떠나 나눔의집 사태는 불교계 이미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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