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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5> 해방정국의 아리랑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대중가요의 아리랑] <25> 해방정국의 아리랑고개 ‘울고 넘는 박달재’

기사승인 2023. 01. 1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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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울고 넘는 박달재'는 대폿집 젓가락 장단에 구성지게 넘어가던 온 국민의 애창곡이었다.

KBS '가요무대' 역사상 가장 많은 신청이 들어온 곡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 명성을 알만하다. 노랫말이 탄생한 일화부터 살펴본다. 광복 이태 후인 1947년 작사가 반야월이 악극단 순회공연을 위해 전국을 떠돌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서 낡은 트럭 2대에 인력과 무대 장비를 싣고 먼지투성이의 신작로 길을 달리기가 일쑤였다.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려면 산 고개를 넘어야 했다.

부슬비 내리는 오르막길에 트럭의 시동이 꺼져서 일행이 모두 내려서 밀기도 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겨우 고갯마루에 올라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재 이름을 물으니 '박달재'라고 했다. 그런데 저만치 산모퉁이에 부부인 듯한 젊은 남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별 장면이었다. 먼 길을 떠나는 듯한 차림새의 남자와 마주 선 여인은 옷고름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것이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반야월은 이름 모를 남녀의 이별이 온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현지인들에게 박달재에 얽힌 애달픈 전설도 들을 수 있었다. 제천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반야월은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노랫말을 써 내려갔다. 1절은 낮에 본 남녀의 이별 서정을 그렸고, 2절은 박달재의 향토적 전설을 엮었다. 여기에 김교성이 곡을 싣고 박재홍이 부른 것이 바로 '울고 넘는 박달재'이다.

22세의 무명가수 박재홍은 이 한 곡으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래는 전파를 타고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지며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동명의 영화와 악극으로도 제작이 되었다. 훗날 제천시에서는 박달가요제를 열고 박달재노래비를 세웠으며 전설을 형상화한 남녀의 조형물도 조성했다. 한 시절 박달재 휴게소에서는 온종일 '울고 넘는 박달재'가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대중가요의 힘이다.

박달재의 전설은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가슴 아픈 이별 이야기이다. 경상도 사람인 박달 도령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에 주막집 딸 금봉 낭자와 사랑을 나눴다. 박달은 "과거에 급제하면 혼인을 하자"며 떠났고, 금봉은 도토리묵을 싸서 박달의 허리춤에 매달아주며 성공을 빌었다. 그러나 과거에 낙방하고 늦게야 돌아온 박달은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식음을 전폐한 박달은 박달재에 올라 서럽게 울었다. 울다가 지친 박달은 금봉 낭자의 환영을 보고 달려가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 경계에 있는 해발 453m의 고개이다. 비록 직접 가본 사람은 많지 않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이다. 노래 덕분이다. 박달재는 내우외환이 많았던 한국인들이 울며 넘어야 했던 아리랑 고개의 표상일 것이다.

박달재를 넘어가는 것은 해방정국이란 시름겹고 혼란한 시대의 터널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던 서민들의 애달픈 삶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분단과 실향 그리고 이산(離散)에 따른 또 다른 이별의 은유이기도 했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넘어야 하는 곡절 많은 인생고개일 것이다.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인들의 정겨우면서도 눈물겨운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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