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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6> 사모(思母)와 망향의 고개 ‘비 내리는 고모령’

[대중가요의 아리랑] <26> 사모(思母)와 망향의 고개 ‘비 내리는 고모령’

기사승인 2023. 01. 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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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이던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는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고모령'은 우리 민족이 고향을 떠나면서 넘어야 했던,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아픔을 나누었던 인생고개의 상징이다.

노래의 배경은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있는 고모령(顧母嶺)이다. 하지만 노래가 탄생한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한다. 먼저 일제강점기에 징병이나 징용으로 기약 없이 떠나야했던 아들과 어머니가 이별한 고개였다는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대구음악유사-비내리는 고모령'을 쓴 권영재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고모령은 작사가 유호의 가상적 문학공간"이라고 했다.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과 어머니의 이별을 그린 노랫말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도를 펼쳐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고모(顧母)'라는 기막힌 지명을 찾았다는 것이다.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 모자간의 이별 장소로 그보다 더 안성맞춤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다 고개 '령(嶺)'자까지 덧붙여 '고모령'이라는 완성된 단어를 지어냈다는 얘기이다. 고모령은 이렇게 전국적인 유명 고개가 되었다.

현재 대구의 파크호텔 옆쪽으로 돌아서 고모역으로 이어지는 작은 언덕길이 바로 고모령(顧母嶺)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높은 산길을 다소 낮췄다는 얘기가 있지만 '령(嶺)'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하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 한국인이 넘어왔던 험난한 정신적인 고개의 상징이라고 여긴다면 충분할 것이다. 곡절 많은 삶을 살아온 한국인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애틋한 이별의 고개인 것이다.

노래가 발표될 당시 이곳은 대구가 아닌 경산이었다. 인근에 경부선 철도역인 고모역이 있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 국민가요가 되면서 2001년 노래의 무대인 고모령에 노래비를 세웠다. 앞면에는 가사를, 뒷면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를 새겼다. 실제로도 중장년층의 노래방 애창곡으로 많이 호출되는 사모(思母)와 망향(望鄕)의 노래이다.

특이한 것은 가사의 1절과 2절의 정서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1절은 분명코 어머니와 헤어진 아들이 고모령을 넘던 밤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그런데 2절의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은 또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노래는 사모곡으로만 한정할 수가 없게 된다. '고모령'은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람들이 넘어야 했던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이별고개인 것이다.

1948년 발표한 '비 내리는 고모령'은 가수 현인과 작사가 유호 그리고 작곡가 박시춘 콤비의 명작 트로트곡이다. 구슬픈 가사와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로 당대의 히트곡이 된 것은 물론, 지금까지도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여 부르고 있다. KBS 가요무대가 2005년 20주년을 맞아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에도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3위를 차지할 만큼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다.

해방된 조국과 고향에 돌아왔으나 생존을 위해 또다시 고개를 넘어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과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 고향을 등지고 고단한 삶을 이어온 실향민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에게 '비 내리는 고모령'은 또 하나의 아리랑 고개였다.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숱한 고모령을 넘어야 할까. 그럴 때마다 '고모령'은 세파에 지친 우리네 가슴을 어루만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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