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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로 화상회의로 진행된 서명식에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은 박수를 쳤다.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정부는 중국이 주도했다는 외신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지구촌 잔치를 우리가 주도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었나 보다. 참가국의 명목 총생산(GDP)이 전 세계 비중의 무려 30%나 되니 그럴 만도 했다. 중국도 환호했다. 미국과의 무역 갈등에 속만 썩이다가 돌파구를 마련한 셈이 됐으니 말이다.
2012년엔 RCEP의 라이벌이 있었다. 미국이 주도하고 12개 나라가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었다. TPP에 중국은 없었다. 그런데 2017년 1월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사흘 만에 TPP를 탈퇴해 버렸다. 보호무역 기조를 전 세계에 천명한 순간이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TPP를 ‘재앙’이라고 불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중국포위 전략은 무위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기를 살려준 셈이 됐다.
RCEP은 중국의 영향력만 커지고 한미FTA에 비하면 매우 낮은 단계에 불과한데도 문 대통령은 “자유무역의 가치를 수호했다”고 자화자찬했다.
시간을 2011년으로 거슬러보자. 지금의 집권당과 좌파 세력은 한미FTA를 저지한다며 촛불집회를 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어떤 국회의원은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뜨리기도 했고 그 다음 날 민주당은 FTA 원천무효를 주장했다. 마치 나라 전체가 미국의 식민지가 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무지와 선동의 극치였다. 당시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가 협상을 사실상 마무리한 것을 알면서도 협정을 체결한 이명박 정부를 몰아세웠었다.
기가 막힌 것은 집권세력과 여권이다. 한미FTA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던 현 여권이 한미FTA를 합의해 놓고서는, 한미FTA 반대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노무현 FTA는 착하고, 이명박 FTA는 나쁘다는 것인가. 한미FTA의 자유무역은 나라를 망치고 RCEP의 자유무역은 반드시 지켜내야 할 가치인가.
미국이 빠지고 대신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중국이 가입을 검토하기로 했다지만 이는 먼 훗날의 얘기다. 조 바이든 시대에도 미중갈등은 수월하게 봉합되지 않을 것이고, 이 정부의 고질적인 중국 눈치 보기와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명제도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보호무역을 고수하지는 않겠지만 CPTPP에 재가입할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미국이 새로운 결정을 하게 된다면 전통적인 동맹국들과 함께 우리에게 반중국 경제동맹을 요구할 것이고, 결국 대미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미국 주도의 신경제동맹 참여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어떤 길을 가든 결론은 매우 단순하다. 자유무역은 관세를 떨어뜨리는 데에 따른 제품가격 인하일 뿐이다. 관세에 의지해서 경쟁력을 유지하던 좀비 기업들은 타격을 받을 것이고 소비자들이 그 제품과 서비스를 선택한 우량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 더 성장할 것이다. 이는 소비자들이기도 한 일반 국민들에게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