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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랍세계의 형태(Gestalt)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I)

[특별기고] 아랍세계의 형태(Gestalt)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I)

기사승인 2023. 12. 1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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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슬람의 시작

지금 "신(神)들의 전쟁"이 재개된 중동지역은 세계 위대한 종교들의 산실이었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모슬렘이라는 3개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그곳에서 탄생했다. 본문의 주제인 아랍세계는 모슬렘의 영역이다. 서기 570년 메카(Mecca)에서 태어난 무함마드(Muhammad)는 40세의 나이에 신의 계시를 받아 그때부터 약 23년 동안 쿠란(the Quran)이라고 알려진 신의 계시를 기록했다.

서기 6세기 말까지 중동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제국인 비잔틴 제국과 오늘날 바그다드 근처인 크테시폰(Ctesiphon)에 수도를 두고 토착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실천하는 서사니드(Sassanid) 페르시아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서기 602년에 페르시아 제국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침공하여 25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의 세력을 시험했다.

최종적으로 비잔틴 제국이 승리했지만 그들은 함께 탈진하여 마침내 평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이 서로를 무기력하게 만든 이 긴 전쟁은 이슬람의 궁극적인 승리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떤 제국도 통제하지 않던 서부 아라비아의 척박한 사막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하여 세력을 모았다. 무함마드와 그의 신앙공동체는 정치적 조직체를 조직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했고 기존의 종교들을 대체했다.

유례가 없는 확장의 파도는 이슬람의 부상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되게 하였다. 서기 632년에 무함마드가 죽자 아랍의 군대들은 이 새로운 종교를 아프리카의 대서양 해안, 대부분의 스페인, 프랑스 중심부, 그리고 북부 인도까지 확장했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중국의 일부, 그리고 대부분의 동인도들이 그 후 수세기에 걸쳐 뒤따랐다.

이곳에서 상인들이나 정복자들에 의해 전수된 이슬람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아랍의 작은 집단들의 연합체는 그 지역을 수세기 동안 지배했던 제국들을 패퇴시킬 운동을 조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접 사회들은 그때까지 아라비아 반도를 제국적 세력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 아랍인들은 사막과 근처의 비옥한 땅에서 부족 중심적이고 목축업에 종사하는 준-유목민의 삶을 살았다. 이때까지 아랍인들은 거대한 국가나 제국을 수립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세계관

이슬람이 정복하거나 조공을 바치는 비-모슬렘인들을 지배하는 지역은 "이슬람의 집(dar al-Islam)" 혹은 평화의 왕국으로 인식되었다. 그곳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행사한 지상의 정치적 권위에 대한 정당한 계승에 의해서 정의되는 제도인 캘리프(the Caliph)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그 밖의 땅들은 전쟁의 영역(dar al-harb)으로 이슬람의 사명은 이런 영역들을 그 자신의 세계질서 속으로 통합하여 우주적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슬람에 의한 평화(Pax Islamica)가 모든 질서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우주적 체제를 달성하는 전략은 투쟁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확장하도록 신도들에게 맹세하게 하는 의무감인 성전(jihad)이라 부를 것이다. 성전은 전쟁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군사전략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슬람의 메시지를 구하고 확산하는 인간의 완전한 힘을 구사하는 다른 수단, 즉 그 종교의 원칙들을 명예롭게 하는 정신적 노력과 위대한 행동을 포함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신도들은 "그의 심장, 그의 혀, 그의 손, 혹은 검으로" 성전을 실행할 것이다.

진격하는 모슬렘이 상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개종하거나 피보호자의 신분이 아니면 정복이 제안되었다. 절정의 17세기 전투 전야에 포위된 페르시아 제국과 협상하도록 파견된 아랍 모슬렘의 사자는 "이슬람을 포용하면 당신들을 그대로 둘 것이고, 만일 인두세를 내는 데 동의한다면 당신이 보호가 필요할 때 우리는 보호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아랍의 막강한 기병대가 그런 위협을 뒷받침했다. 이슬람 사업의 역동성과 성취를 보면서 전멸의 위협을 느낀 사회들은 새로운 종교와 비전을 채택했다. 이슬람의 확산이 모든 인류를 통일하여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이슬람은 유일한 종교임과 동시에 다수 인종의 '초-국가(superstate)'였다.

◇오스만 제국의 등장과 팽창

모슬렘의 지배영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마침내 위대한 모슬렘 제국이 출현했다. 13세기에 우주적 질서의 꿈이 다시 등장했다. 정복자 오스만(Osman)의 추종자들인 오스만 터키인들이 이끄는 새로운 모슬렘 제국이 그들의 한때 작은 아나톨리 국가(minor Anatolian state)를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잔해에 도전하여 결국 대체할 수 있는 막강한 제국으로 확장했다. 그들은 과거 수세기 동안 위대한 이슬람 캘리프 왕국들에 대한 계승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스스로 통일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들임을 자처하면서 그들은 처음에 발칸으로 성전들을 내세운 갈등들에 의해 전 방위로 확장했다. 1453년 그들은 마침내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지리상 전략적으로 보스포러스 해협(the Bosphorus Strait)에 걸터앉았다. 그다음에 그들은 남쪽과 서쪽으로 아라비아 반도,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동유럽, 그리고 코카서스로 진격하여 동 지중해에서 지배적인 연안지역의 지배국이 되었다. 초기 이슬람 제국처럼 오스만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사명을 우주적으로 인식하여 세계질서를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Sultans)은 자신들을 지상에서 신의 그림자(the Shadow of God)이며 세계를 보호하는 지배자로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은 500여 년 전 그것의 선임자들처럼 그것이 서쪽으로 확장하면서 서유럽 국가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후에 유럽의 다극적 국제체제(the multipola international system)로 제도화된 것과 자신이 유일한 우주적 제국이라는 오스만의 개념 사이의 차이는 그들 간의 상호작용에 복잡한 성격을 부여했다. 오스만인들은 유럽 국가들을 정당하거나 평등한 존재로 수락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슬람의 교리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힘의 관계에 대한 판단을 반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오스만 제국은 영토적으로 모든 서유럽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더 컸으며 수십 년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서유럽 국가들의 어떤 연합세력보다도 군사적으로 더 강력했다. 이런 맥락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식 문건들은 유럽의 군주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인 술탄보다도 의전상 낮은 지위를 부여했다. 그것은 술탄의 고관이나 수상에 버금갔다. 같은 이유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도록 허용된 유럽의 대사들은 탄원자의 지위로 간주되었다. 이 사자들과 협상된 계약들은 쌍무적 조약들이 아니라 일방적이고 위대한 술탄에 의해 언제든지 회수될 특권의 승인에 지나지 않았다.

◇유럽과 오스만 제국의 지정학적 제휴

오스만인들은 군사적 능력의 한계에 달했을 때 유럽은 종종 전술적 이익을 위해 상호 간 제휴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따금씩, 전략적이고 상업적 이익이 종교적 교리를 피해갔다. 1562년 남쪽으로는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힘과 동쪽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에 자신이 둘러싸인 것을 걱정하는 프랑스가 오스만의 술래이만 황제에게 군사동맹을 제안했다. 그것은 프랑스가 동일한 전략적 개념으로 가톨릭 프랑스가 100년 후에 30년 종교전쟁에서 개신교의 대의와 스스로 제휴한 것과 같다. 합스부르크의 세력을 동유럽에서 오스만 야심에 대한 주된 장애물로 간주한 술래이만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Francis I)를 명백한 주니어 파트너로 취급했지만 그 제휴제안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동맹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맹은 도덕적 평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의 지원을 위에서 하명하는 일방적인 행위로 부여했다. 그리하여 스페인과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오스만-프랑스 간의 합동 해군작전을 포함하는 성공적 군사협력이 등장했다. 동일한 법칙을 활용하여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인들을 뛰어넘어 페르시아에 있는 시아 사파비드 왕조(Shia Safavid Dynasty)와 동맹을 간청했다. 적어도 한동안 지정학적인 명령이 이데올로기를 압도했다.

◇오스만 제국의 쇠락과 유럽의 팽창

유럽에서 기나긴 종교전쟁 후 1648년 베스트팔렌 체제가 등장했다. 그 후 유럽에 대한 모슬렘 제국의 침공이 재개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스만 제국군이 1683년 오스트리아의 빈(Vienna)에 도달하여 그 도시를 포위한 사건이었다. 그 해에 사보이의 유진(Eugene of Savoy)이 이끄는 유럽의 군대에 의해서 깨어진 빈의 포위는 모슬렘 제국 팽창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 이후 오스만 제국은 궁정의 정통파 종교적 파당들이 근대화에 저항함으로써 점점 경화되었다. 반면에 유럽에선 혁명에 따른 격동의 시대를 경험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20년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 후 빈에서 평화가 회복되고 유럽협조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자 모슬렘 세력과 유럽 세력의 변화는 팽창의 방향을 역전시켰다. 러시아가 북쪽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밀어붙여 흑해와 코카서스로 진격했으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동쪽과 서쪽에서 발칸으로 진격했고 그 사이에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최고 보석인 이집트에서 영향력을 위한 경쟁을 벌였다.

국내적 혼란으로 격변에 처한 오스만 제국은 서방국가들이 의해서 "유럽의 병자(the Sick Man of Europe)"로 취급되었다. 외교사가들은 이때 오스만 제국의 문제를 동방문제(the Eastern Question)라고 불렀다. 19세기 동안에 주요 유럽 강대국들이 유럽의 힘의 균형을 뒤엎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나눠먹으려 시도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강대국들을 상대로 약자의 수단을 사용했다. 오스만인들은 경쟁하는 강대국들의 관계를 조종하여 최대한 행동의 자유를 달성하려고 노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말에 유럽의 베스트팔렌 국제질서의 잠정적인 회원국으로서 유럽의 균형 과정에 진입했지만 그러나 자국의 운명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퇴락하는 강대국으로 간주되었다. 즉 오스만 제국의 무게는 유럽의 균형을 수립하는 데 고려 대상이 되었지만 그것을 계획하는 충분한 파트너로는 간주되지 않았다. 영국은 러시아가 흑해 해협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이용했다.

오스트리아는 발칸의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과의 동맹을 교체해 갔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맺었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미래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에 전적으로 달려있게 되었다. (계속)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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