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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아랍세계의 형태(Gestalt)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II)

[특별기고] 아랍세계의 형태(Gestalt)는 어떻게 진화하였는가? (II)

기사승인 2023. 12. 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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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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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베스트팔렌 국제체제와 이슬람 체제로부터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명분을 끌어내며 독일편에 서서 참전했다. 오스만 관리들은 성전을 선언하고 이슬람을 괴멸할 목적으로 이슬람 세계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고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영국을 비난하면서 모든 국가의 모슬렘인들을 위한 종교적 의무를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추동력은 지구적 성전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국가이익이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의 원칙이 범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 원칙은 유럽의 강대국들에겐 여전히 미래의 이상으로 남았다.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핵심적 모슬렘 지도자들은 힌두교 동포들과 합심하여 종교 대신에 독립운동에 집중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민족적 야망이 깨어났다. 범(凡)이슬람 지지에 대한 독일의 희망은 한갓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1918년 제1차 대전의 종식에 따라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들은 여러 가지 부과된 메커니즘으로 베스트팔렌 국제체제 안으로 편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중동 분할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에 남겨진 부분과 1920년에 체결된 세브르(Sevres)조약은 중동을 그때까지 정치적 용어가 아닌 개념으로서 일종의 국가들의 조각보(patchwork)로 생각했다. 이집트와 비-아랍 이란 같은 몇 국가들은 과거에 제국으로서 그리고 문화적 실체로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발명되었는데 그것들은 여전히 지도가 필요한 맹아적 국가들로 정의하는 식민주의의 다양한 속임수이거나 가부장적 시도였다. 1916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시케스-페코트 협정(the Sykes-Picot Agreement)은 중동을 사실상 그들 간의 영향권으로 분할했다. 국제연맹에 의해서 비준된 위임통치제도는 이 분할에 효력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에 위임되었고 후에 이라크가 된 메소포타미아는 영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중해 해안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은 팔레스타인을 위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이런 실체들의 각각은 복수의 종파적이고 인종적 집단을 내포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서로 간 갈등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위임 통치하는 강대국으로 하여금 부분적으로 긴장을 조장하여 그들을 지배하게 하였고 그 과정에서 후에 전쟁과 내전들의 불씨를 심었다.

◇영국정부의 발푸어 선언과 이스라엘 건국

급성장하는 시오니즘에 관해 1917년 영국정부의 발푸어 선언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조국의 수립을 찬성한다고 발표했다. 반면에 영국정부는 기존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시민적 및 종교적 권리를 해칠 어떠한 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임이 확실히 이해되고 있다고 보장했다. 영국은 동일한 영토를 메카의 사리프(the Sharif of Mecca)에게도 역시 약속하는 듯함으로써 이 표현방식을 합성했다. 이러한 권력의 재조정은 거대한 혼란을 일으켰다. 1924년 불타버린 오스만 터키의 잿더미 속에서 새로 선포된 터키 공화국(Republic of Turkey)이 탄생했다. 신생 터키 국가의 세속적이고 민족주의적 지도자들은 범이슬람 통일의 주된 제도인 캘리프를 폐지하고 세속적 국가로 전환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 모슬렘 세계가 승리한 베스트팔렌 국제질서와 지금도 실현될 것 같지 않은 이슬람 집(Dar al-Islam)의 개념 사이에 좌초했다. 아무런 경험도 없이 중동의 사회들은 자신들을 대부분이 역사적 뿌리가 전혀 없는 국경선을 가진 근대국가들로 재(再)정의되기 시작했다.

◇범아랍주의자들 vs 정치적 이슬람

유럽식 세속적 국가의 등장은 아랍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었다. 아랍의 첫 반응은 그들 자신들의 목적에 주권과 근대국가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통상적이고 정치적인 엘리트들은 베스트팔렌 질서의 틀과 지구적 경제 내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합류할 그들 인민들의 권리였다. 그들의 진정한 단결을 위한 구호는 베스트팔렌 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기존의 정치적 단위들을 위한 진정한 독립이었다. 이런 목적들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세속화의 흐름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에서처럼 다원적 국가질서에서 절정을 이루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추세가 등장했다. "범아랍주의자들"은 국가를 토대로 하는 체제의 전제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국가는 하나의 통일된 아랍국가로 단일 인종, 언어, 그리고 문화적 실체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치적 이슬람"은 근대 아랍 정체를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공통의 종교에 대한 의존을 고집했다. 모슬렘 형제애가 지금은 가장 익숙한 표현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종종 새 중산계급의 높은 교육을 받은 계층에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주의를 서구화 없이 오직 근대화되기 위해 그들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채 전후 시대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간주했다.

◇유럽강대국 대신 미국이 중동의 주된 외부세력으로 등장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유럽의 강대국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중동을 위해 계획했던 지역적 질서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강력했다. 그 후에는 점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주민들을 통제할 유럽 강대국들의 능력이 사라졌다. 그러자 미국이 주된 외부 영향력으로 등장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예멘, 그리고 리비아에서 다소 봉건적이고 군주주의적 정부들이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서 타도되었으며 이 새로운 군사 지도자들은 세속적 통치를 수립해 나갔다. 그러나 이슬람의 유산이 곧 다시 되살아났다. 세속적 통치자들의 과잉과 실패를 종교적 통치의 필요성에 대한 쿠란의 주장을 결합하여 기존국가들을 대체하는 범이슬람의 신정(a pan-Islamic theocracy)의 수립을 주창했다. 그들은 서방과 소련을 똑같이 비난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회주의적 테러행위로 자기들의 비전을 뒷받침했다.

◇나세르, 후세인 등 군사통치자들의 등장

중동의 군사통치자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운동들을 억압하면서 가혹하게 대응했다. 그것들은 근대화와 국가적 통일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중동에서 군사적이고 군주제의 정부들은 이견을 난동으로 취급하여 시민사회나 다원적 문화들이 발전할 공간을 별로 남기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전제적 민족주의 맥락 속에서 현대의 국제질서와 일시적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Nasser)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과 같은 보다 야심적 지배자들은 무력이나 아니면 아랍통일에 대한 선동적 호소를 통해 그들의 영토적 확장을 시도했다. 1958에서 1961년까지 이집트와 시리아 간의 단명했던 국가연합이 그런 시도를 반영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아랍국들이 자신들의 세습 유산의 보호에 집착한 나머지 보다 넓은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군사 지배자들을 위한 정책의 공동토대는 국가이고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이 기존의 국경선과 거의 일치했다.

◇중동 군사통치자들의 미소 냉전 이용

이런 맥락에서 중동의 군사통치자들은 자기들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을 이용하려고 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소련은 미국에 압력을 가하는 그들의 수단이었다. 소련은 아랍 국가들을 위한 무기 공급자였으며 외교적 대변자가 되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랍 국가들은 소련의 국제적 목적을 일반적으로 지지했다. 군사 전제주의자들은 아랍 사회주의에 일반적 충성과 소련의 경제모델에 대한 칭송을 공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경제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로 남았고 기술 관료들에 의해 운영되는 한 가지 산업에 집중했다. 군사정권들이 생각하기에 제1차적인 추동력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국가이익이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친소(親蘇)에서 미국 동맹국으로 선회

이슬람과 비-이슬람 세계 사이 냉전시대의 관계는 전반적으로 이런 본질적으로 베스트팔렌식 힘의 균형 접근법을 따랐다. 이집트, 시리아, 알제리 그리고 이라크는 일반적으로 소련의 정책을 지지했고 소련의 지도를 따랐다. 반면에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그리고 모로코는 미국에 우호적이었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미국의 지원에 의존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 이 모든 국가들은 세속적 국가들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73~1974년에 이런 제휴관계는 변했다. 소련이 무기는 공급해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1967년 6일 전쟁(the Six-Day War) 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 반도의 회복을 향한 외교적 진전을 제공할 수 없다고 확신한 안와르 알-사다트(Anwar al-Sadat) 이집트 대통령은 편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이집트는 사실상 미국의 동맹국으로 운영되었다. 이집트의 안전은 소련의 무기가 아니라 미국의 무기에 토대를 두었다. 시리아와 알제리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보다 등거리의 위치로 이동했다. 중동에서 소련의 지역적 역할은 크게 축소되었다.

◇이스라엘 등장과 4차례 전쟁…발칸의 위기를 닮아가는 중동 위기

아랍의 입장을 통일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쟁점은 주권국가로서 이스라엘의 등장과 국제적으로 인정된 유대인들의 조국이었다. 이런 전망에 대한 아랍의 저항은 1948, 1956, 1967, 그리고 1973년의 4번에 걸친 전쟁이었다. 이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사다트 대통령의 사실상 반-소련 궤도로 바꾼 것은 이집트의 국가이익에 토대를 두었다. 그것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 이스라엘 군 철수협정과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가져온 강렬한 외교의 시기를 열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아랍연맹(the Arab League)에서 축출되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비난을 받고 그리고 결국 암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용기 있는 행동들은 비교될만한 이스라엘과의 조정을 달성하는 모방자들을 발견했다.

즉, 1974년에 시리아와 이스라엘은 양국 사이에 군사적 전선을 정의하고 보호하는 철수협정을 맺었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결국 평화협정에서 절정을 이룬 상호억제를 실천했다. 국제적으로 시리아와 이라크의 권위주위 체제는 여전히 소련으로 기울었지만 그러나 경우에 따라 다른 정책을 지지할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70년대 말까지 중동의 2류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가적 목적을 위해 지배적 강대국들의 경쟁을 조장하려 노력함으로써 중동의 위기는 점점 19세기 유럽 발칸의 위기를 닮아갔다. (계속)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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