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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정치란 결국 무지개를 쫓듯 허망한 일일까?

[강성학 칼럼] 정치란 결국 무지개를 쫓듯 허망한 일일까?

기사승인 2024. 01. 0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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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정치란 결국 보람 없는(thankless) 일이다." 이것은 19세기 독일 철의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0tto von Bismarck)의 탄식이었다. 한국 정치의 풍운아라고 일컬어지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정치란 허업(虛業)이라고 말함으로써 정치평가들에 의해 종종 인용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뒷동산에 걸쳐 있는 무지개를 쫓듯 결국 허망한 일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을 국제사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강대국으로 인정받게 하고, 또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20세기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유일하게 러시모어 바위산(the Mount Rushmore)에 그의 얼굴이 새겨진 탁월한 정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에게 "정치는 참으로 고결한 직업(a noble profession)"이었다. 그에게는 "올바른 것을 위해 저돌적으로 싸우는 것은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고결한 스포츠"였다. 정치가 참으로 고결한 직업이 아니라면 미합중국을 창업한 조지 워싱턴의 거룩한 정치적 리더십이나 미합중국 분열의 대위기에서 수성에 성공하고 노예를 해방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위대한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서구 문명을 나치의 잔혹한 위험에서 구원한 윈스턴 처칠의 위대한 정치도 한낱 허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정치는 결코 허업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을 짐승이나 신(神)과 구분 짓게 하는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이상의 성취는 항상 열망에 미치지 못한다. 짐승은 타고난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고양이는 사자가 되려고 모색하지 않는다. 신도 역시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은 이미 그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어 전지전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면서 신이 되길 열망한다. 즉 인간은 야심적 동물임과 동시에 좌절한 신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만이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인지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사에는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괴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전 정치철학에선 그러한 괴리의 극복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신념이었다. 플라톤은 철인왕이 지배하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이상과 현실의 이중구조가 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상이 반드시 현실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그러한 사회는 지상에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언술 속에서(in speech)만 가능한 것이라고 물러섰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사회를 세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고 비판했다. 그것은 베르너 예거(Werner Jaeger)의 표현을 빌린다면 '파이데이아(Paideia)'의 비극으로 끝났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자족할 수 있는 행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단순히 함께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은 고결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고전 철학의 핵심은 모든 인간이 규범적 원칙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Ought)'였다.

우리는 그러한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를 종교나 고전 철학에서 공통으로 가정하는 '당위'의 추구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존재(Is)'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정치의 영역이란 윤리적 평가가 단지 이념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 정치적 기술의 규칙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지배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에서 비롯되는 근대 정치철학은 정치를 전혀 다른 것으로 본다. 그들의 시각은 당위에서 시작하지 않고 현실(Is)에서 시작한다. 정치의 근대적 문을 최초로 연 사람은 토마스 홉스였다. 그에게 인간은 원래 미덕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오직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였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일종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발견이었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비참한 삶을 영유한다. 즉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며, 불결하고, 야만적이며, 짧다." 그들의 비참함은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자연적 특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공포가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어 결국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 그로 하여금 그와 관련된 모든 인간과 계약을 체결하여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는 공통의 지도자나 주권자에게 복종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으로 레바이어턴(Leviathan), 즉 근대 주권 국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공포가 인간으로 하여금 평화를 추구하게 만들고 평화의 규약을 제시하는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것이 다른 말로는 자연법(the Law of Nature)인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고 신성시하게 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홉스에 의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이제 정치는 인간의 삶을 고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제도는 더 이상 정치적 이슈가 아니었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말처럼, "최악의 정부도 무정부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에 대한 홉스적 이해는 근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그의 지성적 후계자들(로크, 루소, 칸트)은 정치에 있어 적나라한 권력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면서 인간이란 오직 적나라한 권력의 추구자가 아닌 도덕적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거의 모든 국민들이 동원되고 참여하는 총력전이었다. 다시 말해 "전 국민의 정치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정치는 여론과 압력, 선전이나 그 밖의 단순한 폭력이 충돌하는 현장이며 우리의 일상사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절차적 과정이 되었다. 정치가 정말로 보람 없는 따분한 직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정치란 보람 없는 일이라고 탄식했을 때는 그가 쓸모없이 치열한 정치투쟁을 벌일 때나 그가 퇴임 후 자신이 그렇게 애써 추구했던 올바른 정책들이 독일의 카이저와 자신의 멍청한 후임자들에 의해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의 탄식이 틀림없이 타당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가 불멸의 천재-정치가라는 세계사적 평가를 지하에서 들었을 때도 같은 생각일까? 위대한 정치가는 종종 동시대인들에게 배신당했지만, 후세인들의 회고적 칭송을 받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숙명일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역사창조의 특권적 지위와 기회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자신의 헌신이 허망한 것으로 귀결된다면 그런 역사적 평가도 겸허히 받아 들어야 하는 것이 정치가의 숙명이다. 최종적 평가는 역사가들에게 맡기고 적어도 정치 지망자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정치에 관해서 정의했던 것처럼, "고결한 직업"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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