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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처칠, 윌슨, 워싱턴, 루스벨트와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강성학 칼럼] 처칠, 윌슨, 워싱턴, 루스벨트와 대한민국 국부 이승만

기사승인 2024. 02. 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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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초에 집권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 대한 복수의 전쟁을 준비하던 1938년까지 윈스턴 처칠은 독일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영국의 평화주의자 네빌 체임벌린 정부의 대독 유화정책에 비판적인 자신의 연설문들을 모아 1938년에 <영국이 잠든 사이에>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다음해인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 황야에서 카산드라가 홀로 외쳤던 울부짖음 같은 외로운 예언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 체임벌린 정부가 무너지고 윈스턴 처칠 자신이 영국의 수상직에 오름으로써 영국은 비로소 히틀러에 맞섰다. 처칠은 프랑스의 패망으로 위험에 처한 33만8000명의 병사들을 뎅케르크에서 철수시키는 기적 같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직후인 6월 4일 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영국은 결코 항복하거나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미국 제일주의'에 젖어 중립을 고수하던 바로 그때에도 처칠은 "신세계가 그의 모든 권력과 무력을 가지고 늦지 않게 구세계를 구원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나설 때까지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미국의 참전을 당연시했다. 그는 역사상 고대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19세기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최고 연설에 버금가는 실로 가장 위대하고 또 가장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그의 예언대로 미국에 의해 유럽은 나치의 폭정에서 해방되었다.

미국에서 평생 동안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대한독립을 위해 참으로 고독한 투쟁을 벌이던 이승만 박사는 1941년 여름에 일본인들의 침략성을 미국인들에게 경고하는 <일본내막기: 오늘의 도전>이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제국의 끝없는 침략적 야욕을 경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도 유럽에서 처칠의 경우처럼 처음엔 미국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도 역시 불행했던 예언자 카산드라의 운명을 따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책이 출간된 뒤 5개월 만에 일본제국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인들은 갑자기 이승만 박사를 놀라운 예언자로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책은 당시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그는 미국의 주요 정부 인사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의 대미 로비활동은 한 단계 격상되었다. 처칠의 말처럼 민주국가인 미국의 국민들은 눈앞에 폭탄이 터져야만 그 위험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정에서 처칠은 얄타회담에서 나치스를 대체하려 드는 스탈린의 공산 제국주의적 야욕을 일찍이 간파했다. 처칠은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그들을 가르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처칠은 '악마의 신념'이라는 제목의 한 기사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북극과 남극을 상기시키는 메타포를 사용해 표현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남극과 북극은 지구의 반대쪽에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어느 한쪽 극에서 내일 잠에서 깬다면 당신은 어느 쪽 극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한쪽엔 더 많은 펭귄들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쪽엔 보다 많은 곰들이 있을 것이지만 주변엔 온통 얼음과 눈, 그리고 매섭게 부는 바람만 있을 것이다." 결국 파시즘과 공산주의 전체주의는 남극과 북극처럼 사람이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승만 박사도 일본제국주의를 대체하는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주의적 야욕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간파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박사는 철저한 반-일본제국주의 투사에서 일본제국의 패망과 함께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처칠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박사에게도 파시스트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전체주의는 동일한 '악의 제국'이었다. 이승만 박사의 그런 정치적 비전과 사상적 신념은 학창시절에 이미 형성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국제법 학자였다. 1910년대에는 아직 국제정치학이 독립적 학문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국제법이나 역사학에서 외교사가 국제정치를 공부하는 유일한 과목들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었던 그의 스승 우드로 윌슨이 미국의 제28대 대통령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윌슨주의자가 되었다.

윌슨 대통령은 "당시 전쟁을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고, 또 평화지향적인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함으로써 전후 세계는 '민주주의'와 침략제국에서 해방된 '민족의 자결'이 시대정신이 되었다. 미국 최초의 '철인-대통령'이었던 윌슨은 당시까지 수백 년간 국제질서의 기반이었던 힘의 균형체제를 거부하고 집단안전보장 제도인 국제연맹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계획했다. 이제 국제정치는 미국의 주도하에 권력투쟁이 아니라 국제법과 도덕 그리고 세계여론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추세를 예리하게 간파한 이승만 박사는 대한독립을 달성하는 방식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법과 세계여론에 의존하는 국제외교의 방식을 선택하였다. 이제 그에게 대한독립은 국제외교에 달려있었다. 그는 철저한 윌슨주의자로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독립을 일관되게 추구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한반도에서 6·25라는 북한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전쟁으로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가 세운 대한민국은 오늘날 국제사회의 모두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명예로운 국부다. 그는 미합중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에 비견할 만하다. 조지 워싱턴은 일생 동안 무장한 예언자로서 미국의 독립을 달성했지만 이승만 박사는 일생 동안 비무장 예언자로서 오직 외교적 수완으로 자유 민주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조지 워싱턴에게는 친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미합중국이 조지 워싱턴의 유일한 자식이 되었다. 미국인들은 그래서 자랑스럽게 미국이 조지 워싱턴의 나라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의 국부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친자식이 없다. 대한민국만이 그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런 영광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이승만 박사가 조지 워싱턴의 길을 가지 않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전쟁수행을 구실 삼아 미국에서 대통령은 계속해서 재임까지만 허용한다는 국부 워싱턴이 세운 전통의 불문율을 깨고 4선까지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마땅한 후임자가 없어 루스벨트처럼 4선까지 감행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그 후 오랫동안 독재자라는 오명으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2024년 우파정부의 재집권 이후 한국인들은 역사적 사실의 재인식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세계사적 위대성을 재발견했다. 이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유일한 '철인-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에게 영광된 대한민국 국부의 지위를 되돌려드릴 때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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