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이각범 칼럼] 대한민국 건국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tooauto.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311010005271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3. 11. 18:01

이각범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대한민국 건국 전후 '자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대결
-기회는 평등해야 한다는 이승만 철학 반(反)봉건적 신분제 타파와 자유시장경제 확립을 위한 농지개혁
-휴전 당시 탁월한 외교력으로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무상원조
-평화선 획정으로 독도의 실효적 지배와 해양주권 확보
-자유의 투사 이승만 대통령 격하운동 벌여 온 '자유 없는 민주주의 세력'은 오는 총선에서 대거 원내진출 노려

1945년 태평양전쟁의 종식과 더불어 찾아온 해방. 그 혼란의 소용돌이를 뚫고 대한민국 건국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하여 '자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대결이 이어졌다. 전자의 길을 택한 대한민국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고, 후자의 길을 택한 북한은 빈곤과 폭압의 체제 아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 차례 진정한 독립은 정치적 독립과 더불어 경제적 발전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강조하였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룩하기 위하여 그는 헌신하였다.

농지개혁은 "기회는 평등하여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철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제헌의회 선거 때부터 성별과 빈부, 교육정도에 상관없이 성인이 된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투표권을 가졌다.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의 선진국 중에서도 1948년 당시까지 여성의 선거권이 부여되지 않은 나라가 있었다. 민주주의 최선진국 미국조차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인종구분 없는 보통선거를 실시할 수 있었다. 농지개혁은 반(半)봉건적 신분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예해방'이었다.

농지개혁으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세우고,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려 한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는 북한의 남침으로 절반만 관철되었다. 지주들이 받은 토지채권의 가치가 전쟁 때의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급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외의 소득이 있었다. "인민군이 남조선으로 진주하면 땅 없는 전국의 인민들이 봉기하여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게 될 것이다." 남로당 당수이자, 북한의 부수상이던 박헌영이 한 호언(豪言)은 허언(虛言)이 되어버렸다. 남한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새로 받은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북한군과 싸웠다.
6·25 전쟁은 국군 사상자와 실종자 도합 60만9000여 명과 민간인 사망자 24만5000여 명, 학살된 13만여 명 등을 합하여 100만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 상황에서 휴전이 된다면 국력으로 250배가 넘는 중국, 400배가 넘는 소련과 더불어 재침(再侵)의 시간을 벌려는 북한과 다시 전쟁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한반도의 경제적·군사적 가치를 과소평가한 미국이었다. 좌우합작 정권을 세운 뒤 한반도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미국의 방침을 꺾고 이승만 박사는 자유민주주의의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조건 없는 휴전을 한 뒤 UN군이 철수한다면 대한민국은 역사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동북아시아 주변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약한 국력을 가지고도 이승만 대통령은 탁월한 외교력으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천문학적 수준의 무상원조 조약 체결을 얻어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70년이 넘는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전후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예산의 20%를 교육비에 할애하였다. 국방비 다음으로 많은 액수였다. 의무교육 제도를 실시하여 문맹률을 20% 이하로 낮추고, 전 국민이 자유민주주의 교육과 과학교육을 받게 하였다. 부족한 외화를 쥐어짜서 젊고 유망한 젊은이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선진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60~19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1세대 과학기술인들이 양성되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평화선(Peace Line)을 설정하였다. 평화선이란 대한민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동으로는 독도, 대한해협을 거쳐, 남으로는 제주도 남쪽바다인 북위 32도, 서로는 동경 124도까지를 우리나라 영해로 선포한 것이다.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을 이승만 대통령은 확실하게 지켰다. 평화선을 세계에서는 Lee-Line으로 불렀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해상경비를 강화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바다 주권을 확실하게 하였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서 해군을 가장 사랑한 대통령. 그의 높은 예지력으로 일본이 미국을 기습 침공할 것이라는 것을 알렸으며(Japan Inside Out), 1년에 수백회가 넘는 강연과 저술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양분될 세계 속에서 독립된 대한민국이 자유진영의 최전선국가가 되리라는 예견을 설파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설정과 해군중시 정책은 장차 이 나라가 동북아시아의 약소국 지위를 떨치고 대양으로 나아가야 할 나라라는 비전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던 날, 오픈카를 타고 경무대를 나오던 메카나기 주한 미국대사의 찡그린 얼굴과 몇 시간 뒤 경무대를 나와 이화장으로 향하던 이승만대통령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연도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슬픔 속에서, 혹은 눈물을 훔치던 손수건을 흔들며 물러나는 노(老)대통령 부부를 환송하였다. 이화장 주변까지 가득 메운 군중들의 연호에 이승만 대통령이 담장 너머로 화답하는 모습이 다음 날 조간신문 1면에 게재되었다. 세상에 어느 나라에서 독재자가 민중혁명으로 물러가는데, 국민들이 달려가 눈물로 환송하고 "이승만 대통령 만수무강" 이라 쓴 피켓을 드는가.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하라"는 구호는 없었다. 학생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의 실상과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하여 4·19 시위를 한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는 1960년대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한 미국의 요구를 완고한 반일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 제1천재'로 칭송받던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심으로 세운 민주국가 대한민국은 없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나라를 보존할 수 없었을뿐더러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한 기반을 닦을 수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강권한 미국도 "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므로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십니다. 그 명예를 지키십시오"라며 설득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노예를 해방한 한국의 링컨이고,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루스벨트를 모두 합한 영웅이다. 1954년 미국 '영웅의 거리'를 외국원수로서는 최초로 카퍼레이드 할 때 미국언론들은 일제히 그를 한국의 '자유 투사 (Freedom Fighter)'라며 칭송하였다.

대한민국의 국부이자 자유의 영웅 이승만 박사는 그의 퇴임 이후 조직적인 격하운동으로 무능한 친일 반민족세력으로 낙인찍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대대통령 중에서 가장 높은 지식과 학문의 경지를 이루고, 비전과 결단력, 추진력을 갖추었으며 가장 청렴했던 분이다. 중요한 역사적 고비마다 대한민국을 구했던 이 대통령이 지금 이 나라 국민으로부터 아주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격하운동을 벌인 주체는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북한과 '자유 없는 민주주의'세력이다. 그 주력인 운동권 특권세력, 반미, 종북, 반(反)대한민국세력이 한 달 후 총선을 통하여 국회원내에 진출한다. 건국세력과 반건국세력의 한판 승부에서 대한민국 건국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이각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