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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대한민국의 핵무장,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강성학 칼럼] 대한민국의 핵무장,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기사승인 2024. 07. 0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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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우리는 핵무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은 역사적으로 기나긴 과거와 다른 시대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의 조건들은 핵시대의 충격으로 급격히 변해버린 반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와 변함없는 생각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과거에 만들어진 제도들을 통해서 행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철학적인 문제들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과 핵시대가 창조한 객관적 조건들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전쟁 목적을 위한 핵무기의 가용성은 기술의 다른 분야에서 혁명적 전환을 목격한 우리 시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이것은 어느 일순간 귀신처럼 등장한 것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기술적 혁명을 가져오도록 가능하게 한 원칙들은 19세기 전반부에 처음으로 수립되었다.

기술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시대는 증기엔진, 철도, 전신, 그리고 기관총의 발명으로 시작했다. 이 발명들은 기술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즉, 우리 시대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한 시기를 현재의 시기와 분리시켰다. 이 두 개의 시기는 두 개의 상이한 원칙에 의해서 구별되었다.

하나는 첫 시기동안 기술적 발전의 느린 속도와 19세기 전반기 이후 계속적인 가속도를 설명해 준다. 첫 시기 동안에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동물이 발휘하는 힘의 자연적 한계 내에 국한되었다. 이런 한계는 정체된 힘의 사용에 그쳤다.

그러나 두 번째 시기, 즉 우리의 시대에는 인간과 동물이 발휘하는 힘의 보충과 대체로서 인위적으로 새로운 힘의 원천들을 창조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 뚜렷한 특징이다. 인간과 동물의 근육으로 자연이 제공하는 힘을 사용하는 대신에 새로운 힘을 창조할 능력이 우리 시대의 급속한 기술발전을 설명해 준다. 핵무기는 기술의 그런 가속적인 발전의 정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핵무기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국가는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핵무기에 대해 두 개의 상이한 학파의 주장이 있다. 하나는 그 파괴력의 규모로 인해 재래식 무기와의 양적인 차이를 넘어 질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반면에 또 다른 하나는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 사이의 차이가 오직 양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학파는 핵시대에 전면전은 외교정책의 합리적 수단으로서의 유용성은 끝났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모든 교전국들을 파괴함으로써 승자와 패자의 구별을 없앨 것이다. 거의 모든 국가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입으로는 이 명제를 수용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 대중들의 지배적 견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해에 암시적인 핵시대의 유례가 없는 새로움의 가정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에 의해서 정교하게 설명되었다. 그의 저서, 〈인류의 미래〉(The Future of Mankind, 1958)에서 그는 핵시대의 독특한 성질과 그것의 거의 확실시되는 인간과 정치적 결과에 관한 심오한 철학적 분석을 제시했다.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이 원자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모든 인류가 분명히 사라지거나 아니면 인간의 도덕적-정치적 조건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야스퍼스는 "나는 다음 전쟁에서 무슨 무기가 사용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 이후 전쟁은 활과 화살로 싸울 것이다'라는 아인슈타인(Einstein)의 말에 동조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핵시대의 위협적인 새로움에 대한 합리적 성찰이 이를 극복하고 우리를 구원해 줄 전제조건이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전면적 파멸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마침내 핵 전쟁을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불확실하게 만들 유일한 길이다. 이런 전면적 파멸의 위협은 우리의 존재 의미에 관한 생각들을 가리킨다. 원자탄은 특별한 문제로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 만일 인간이 그 문제를 다른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로 취급한다면 그것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들의 급진적 새로움에 상응하는 급진적 변화다. 정치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에 영원한 족적을 남긴 어떤 인간도 순전히 정치적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사고방식이고, 이것을 넘어서, 도덕적, 정치적, 합리적 성질에서 인간 자신의 변환이다." 야스퍼스에게는 핵시대의 새로움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급진적이어서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인간만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 허만 칸(Herman Kahn) 박사가 가장 웅변적이고 독창적으로 대변한 또 하나의 학파가 있다. 그것은 핵전쟁이 재래식 폭력의 양적인 확장에 지나지 않으며 핵전쟁이든 재래식전쟁이든 어떤 전쟁이든 양적으로 평화와 다를 뿐이지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견해다. 칸 박사는 서양의 유일한 전쟁철학자인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서인 〈전쟁론〉(On War)을 변용하여 자신의 저서를 〈핵전쟁론〉(On Thermonuclear War, 1960)이라고 지은 네오-크라우제비치언이라고 볼 수 있다. 네오-크라우제비치언들은 전쟁이란 수단을 달리한 정책의 연속이라고 정의한 클라우제비츠처럼 핵전쟁도 역시 국가정책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허만 칸 박사는 전쟁이란 무서운 것이지만 평화도 그렇다면서, 어떤 점에서, 차이는 정도와 기준의 양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방사선의 유전적 효과에 관해서 칸 박사는 인간이 수백 년 동안 자연의 방사선에 노출되었으며, 새로운 평화 시와 잠재적 전시 노출의 이런 효과들이 무엇이든 그것들은 과거의 것과 종류에서 다르지 않고 오직 보다 강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핵전쟁은 재래식 전쟁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지만 그러나 모든 합리적 국가정책의 도구로서 그것의 사용을 박탈할 만큼 파괴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 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핵무기의 올바른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사용과 적극적이고 수동적 방어의 적합한 방법만 주어진다면 핵전쟁도 완전한 재앙과 자살적 불합리성이기는커녕 개별국가들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칸 박사는 당시 핵전쟁을 다룬 영화의 제목 겸 주인공인 '스티레인지러브 박사(Dr. Strangelove)'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 두 학파 간의 간극이 처음에는 메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학파의 견해가 그렇게 아주 다르지 않다. 네오-크라우제비치언들의 낙관적인 학파는 우리가 핵전쟁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반면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들의 주장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이 낙관적 주장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낙관적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논리적 핵심에서 비관적이다. 왜냐하면 핵전쟁의 낙관적 견해와 정책적 권유들 간의 불일치는 처음부터 낙관적 견해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우선, 칸 박사의 주장은 핵전쟁의 각 개별적 효과들만을 들어 개별적인 각각의 효과에 대한 보호책이 있는지 여부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는 개별적 보호책이 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즉, 불에 대항할 수 있듯이 일차적 방사선에 대항할 구제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전쟁의 파괴적인 효과에 대항하여 효과적인 보호책이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그 효과를 개별적이 아닌 모두가 동시에 직면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무너진다. 이러한 위협의 동시적 발생은 그 위협을 질적으로 변질시킨다. 그는 이 동시 발생의 문제를 다루지 않음으로써 핵심을 놓쳤다. 그는 심장마비, 폐렴, 충수염, 암, 그리고 골절상에 대해 이 질병들이 고립적으로 발생한다면 구제책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의사처럼 주장한다.

그는 이 모든 질병들이 한꺼번에 모두 발생하는 것을 결코 상정하지 않았다. 즉, 그가 이 질병들의 각각에 대해서는 한 가지씩 구제책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질병들을 모두 앓고 있는 환자에게는 아무것도 권유할 것은 없다. 이 양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 연구에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요인들이 빠져 있다.

국제정치학의 아버지 한스 모겐소(Hans Morgenthau)가 경고한 것처럼, 인간이나 사회는 한계점(a breaking point)이 있는 것이다. 칸 박사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필요한 준비를 한다면 핵전쟁으로부터 살아남고 또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규모의 준비를 할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하다.

최근 핵전쟁의 위협과 공포가 갑자기 재등장했다. 레이몽 아롱의 말처럼 "전쟁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평화는 불가능했던" 미·소 간 냉전이 종식되면서 핵전쟁의 위협과 공포가 거의 사라졌지만, 2022년 4월에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의 확대 과정에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필요한 경우에 핵무기의 사용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서방 측에서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이에 맞대응하는 발언을 하면서 핵전쟁의 공포가 갑자기 재등장했다.

동북아지역에서는 미중 간의 신(新)냉전체제가 형성되고 북한의 김정은은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공개적으로 거듭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대선후보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는 11월 선거에서 당선될 경우 한국에 과도한 방위비 부담을 요구할 것이며, 한국이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그동안 북한의 핵위협에 대한 확장된 억제력으로 봉사한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할 게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은 막대한 방위비 부담을 감내할 바에는 차라리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한국 내에서 부상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북한과는 다르게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의 명성을 쌓아왔기에 국제사회의 반대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미국만 용인한다면 이들은 대한민국이 핵을 보유하는 길을 주저 없이 택할 것이다. 물론 기존의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강력히 반대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의 핵무장은 일본의 핵무장을 촉발하여 국제적 핵 비확산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북한, 중국, 그리고 러시아가 한국의 핵무장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바로 그 이유가 오히려 한국이 핵무장을 필요로 한다는 한국의 네오-클라우제비치언들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할 것이다. 한국이 핵무장을 하면 틀림없이 일본이 뒤따를 것이고 그러면 타이완을 제외한 동북아 모든 국가가 핵무장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동북아는 핵의 공포에 의존한 항구적 평화지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무서운 핵전쟁 공포의 지역이 될 것인가?

후자의 경우에 동북아에서 가장 작은 영토의 남북한은 소위 '핵무기 큰 것 한 방'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주변국들의 공갈과 위협에 가장 취약한 곳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인들도 미국과 핵 공유든, 미국의 상시 핵 배치든, 아니면 독자적 핵 보유든 간에 한반도가 핵 지대가 되어 핵무기와 함께 실제로 살아가는 방법을 부지런히 배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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