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시대에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선거 경험도 일천한 대한민국에서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는 여야 모두 애용한 선거전술이었다. 그러나 1960년 3·15 부정선거는 좀 더 달랐다. 이승만은 경쟁자였던 조병옥의 사망으로 유력후보가 없어 당선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니 이승만의 당선을 위한 부정선거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부통령제를 모방한 당시 헌법은 권한도 없는 부통령을 선출하게 하고 대통령 유고 시 권력을 위임받게 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 선출함에 따라 정당이 달라질 수 있었다. 1956년 5·15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자유당, 부통령은 민주당인 오월동주(吳越同舟) 정부의 모양새가 됐다.
1960년 3·15 선거에서도 대통령은 이승만이 유력했으므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부통령의 문제는 심각했다. 85세의 이승만 대통령이 노구의 몸으로 무사히 임기를 마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재임 중 대통령의 유고가 발생할 때 권력은 부통령에게 이임되는바, 그 부통령의 정당이 어디냐에 따라 모든 것이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모든 언론과 모든 야당이 정적(政敵)인 상황에서 평화적 권력교체의 경험이 전무(全無)했던 자유당으로서는 부통령도 자유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켜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정당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분화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전라도 김성수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일보가 민주당의 구파로서, 평안도 안창호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경향신문이 민주당의 신파로서 연합하여 줄기차게 이승만과 자유당을 공격했다. 왕조의 정치문화를 전승받은 야당은 민주주의의 경험도 없이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며 독재 타도를 외쳤다. 조선의 임금 독재, 일제의 총독 독재, 미군정의 군정 독재만을 경험해 놓고도 이승만 독재 타도를 외쳤다. 85세의 대통령이 연임은 하겠지만 머지않아 정권을 내주게 될 자유당은 패닉에 빠졌다.
선거를 관리해야 했던 최인규 내무부장관은 기필코 자유당 부통령 후보를 당선시켜야만 국가가 안전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은 민주당 후보 장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형 직전 남겨진 최인규의 회고록에는 그가 국가를 살리기 위해 부정선거를 해야만 했던 사정을 기록해 두고 있다. 그 결과 이기붕 79.2%, 장면 20.5%로 압승이었으나 이를 불신한 국민은 분노했다.
3·15 부정선거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첫날 마산에서만 7명이 사망했다. 4월 11일에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군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됨에 따라 전국은 요동쳤다. 마산에서는 경찰서 무기고가 털리고 수류탄이 투척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교수와 학생이 궐기 행진을 하고 무장 시위대가 트럭과 버스와 소방차까지 탈취하여 몰고 다니며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사태는 4월 26일까지 지속됐고 총상 사망자만 189명이 발생했다(광주 5·18은 166명).
당시 대한민국에서 초유의 사태를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다름 아닌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대통령에게 진실을 전해주지 않았다. 1956년 1월, 특무부대장 김창룡이 암살된 이후 대통령에게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전달해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보좌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당한 진실과 적당한 거짓을 뒤섞어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한 때문이었다. 김창룡 사후 이승만 대통령은 주위사람들에 의해 이용만 당하는 상황이 지속된 것이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이승만은 병원에 누워있는 부상학생들을 방문했다. 누워있는 학생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학생들이 왜 이리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했다. 독립협회의 행동대원으로 조선왕조의 부패에 저항하며 고종 퇴진 운동을 하다 반체제 시국사범으로 사형수가 되기도 했던 자신의 젊은 날이 떠올랐을 것이다.
|
그리고 한국인들은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보내면서도 여전히 이승만을 '부정선거로 망명 간 건국 대통령'이라고 기억하며 산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을 모시기엔 너무나 무지하고 협량한 국민인지 모르겠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KBS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