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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 단국대 교수 기고-3·1절에 생각하는 역사와 현실정치

김진호 단국대 교수 기고-3·1절에 생각하는 역사와 현실정치

기사승인 2024. 03. 0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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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미국 이은 한국의 두번째 수교국
임시정부 파격 지원하기도 한 맹방
독립 운동가들도 다수 활동
김진호
김진호 단국대학교 교수. 현 대만 중앙연구원 방문연구원./김진호 교수.
역사가 국가와 민족 정체성 확립에 이용되던 민족국가에서 역사의식은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으로 종교와 같은 성역이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서 역사가 정치에 미치는 관성에 속도나 방향 조절이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일이나 한중 관계에서도 각국의 독립운동 역사가 국익을 고려한 정책으로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국사가 국가와 외부의 관계를 자국민 입장에서 기술한 기록이라면, 정치와 대외 관계는 변화하는 국제 환경에 대응하는 현실 정치이기에 국가 이익이 우선시된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시기 국제정세와 현재 국제정세는 대한민국의 처지와 위상에서 차이가 크다. 근대 동아시아 많은 국가는 제국주의 물결에 식민지, 반식민지가 돼 제국주의에 대항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던 한국의 독립운동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임시정부를 두면서 세계 한인들과 연계해 진행됐다.

중국 국민정부 체제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공존하는 시기라 국민당과 기타 세력들과도 협력했다. 당시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우선이었기에 1945년 광복 후 세계 냉전이 시작되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남북한 대치가 일어날 줄도 몰랐다. 통일된 조국의 독립이 주요 이슈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국민당과의 협력으로 진행된 내용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대만으로 이전한 국민당 정부 자료에는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장제스(蔣介石)의 한국 진해 방문과 이승만 대통령의 대만 방문은 본격적 냉전 충돌인 6·25전쟁 전후의 일이라는 점에서, 한반도 남북의 내전이라는 의미 외에도 국제사회 냉전의 시작을 알린다는 면에서 중요했다.

당시 한국과 중국(중화민국·이하 대만)의 관계는 한국 독립과 6·25전쟁 전후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한 1992년 이후에는 한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 유대를 강화하는 내용이 많았다. 정치적 역사 끌어들이기이기도 하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을 대신해 중국의 정통국가라는 주장 때문에 한중 관계를 강조하고 국내 정치환경을 만들기 위해 이뤄진 사회주의 건국이념 '반제국, 반식민지' 정신의 강조일 수도 있다. 현실 정치는 역사를 동원하기도 하고 역사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만큼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고 독립되는 과정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49년 건국됐기 때문이다. 이런 예와 같이 현실 정치에서는 과거의 역사를 다르게 해석하며 역사를 소급하는 국가이익을 고려한 정치적 타협도 생기기도 한다.

이런 것도 당시에는 현실정치였겠지만 이제는 역사 속 얘기이다. 과거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을 보면 언제 역사를 공유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것이 역사의식 공유와 현실 정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1년 유엔에서 탈퇴한 대만은 우리 국부격인 독립지도자 김구와 국민당의 역사, 그리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안보리 상임이사국 장제스 총통의 교류가 담겨 있는 역사 자료가 꽤 있어 역사적 유대를 갖는다.

그러나 산업 발전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하는 상태이다. 여하튼,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만, 현실 정치에 국가와 국민 이익을 소홀히 하면 그 정부는 국민과 국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 고려하며 정치에 임하는 지도자는 민족 선구자들의 정신인 옮음을 따르고 '봉공멸사' 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대만은 대한민국이 건국한 이후 미국 다음으로 수교를 맺은 국가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를 대표하는 아시아의 강국이었다. 이곳에는 대한민국 근대와 현대사의 역사가 녹아 있다. 그 당시 한국은 정말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이 국가는 한국을 적지 않게 도와줬다.

일본 식민지인 대만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년) 의사는 이곳에서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王) 육군 대장을 보검으로 척살한 독립운동가로, 1928년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만 4
1일 대만 한국학교에서 열린 3·1절 기념식./김진호 교수.
한국 정부는 1963년 그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 조명하 의사의 동상이 있는 곳이 대만 타이베이(臺北)에 있는 한국학교이다. 과거 신이루信義路) 4단에 있던 학교가 당시 현지 정부의 도움으로 지금의 청년공원 근처로 이사했는데, 한국 언론계 중국 전문가로 유명한 유상철 기자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이 한국학교에서 2024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맞이해 강당에 한국 대표부 이은호 대표를 포함한 교민 원로 김달훈 목사와 전 교민회장 조정호 샴푸여행사 대표 등 많은 교민과 학생들이 참가해 독립 정신을 기리며 애국가와 삼일절 노래도 합창하고 '만세 삼창'을 외쳤다. 지금은 중국과 수교해 단교 된 상태이지만 한국과 대만 역사와 현재의 교류 현장에 타이베이 한국 교민학교와 교민들이 있는 것이다.

현실 정치는 적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안보와 경제에서 '유비무한' 하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은감불원'이라는 역사적 교훈과 현실정치에서의 국익은 충돌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국가 발전을 위해 시너지 효과를 이루며 국민의 행복과 세계 시민사회의 발전에 공헌해 더 나은 역사를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한민족의 길일 것이다.

이은호 대표부 대표는 "지금 우리는 시대사적 대변혁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 자유를 확대하고, 평화를 확장하며, 번영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면서 역사를 이을 뿐 아니라 국가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부의 말을 전했다. 이곳 타이베이의 3월 1일에는 한국 역사의 맥을 잇는 독립운동사 기념의 역사가 있었다.

김진호 단국대학교 교수/대만 중앙연구원 방문연구원(haisan8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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