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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안전할까?

[강성학 칼럼] 유럽의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안전할까?

기사승인 2023. 09. 1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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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의하면 문명은 동작과 휴식을 번갈아 가며 진화한다. 이 말을 좀 융통성 있게 응용한다면 문명은, 즉 역사는 전쟁과 전쟁을 준비하는 평화의 시대가 번갈아 가며 발전한다고 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동작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 유럽은 미-소 두 초강대국에 의해 분할된 채 국제정치의 주역이 아니라 객체로 전락하여 긴 냉전체제라는 불안전한 휴식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불완전한 동작의 시대였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냉전종식 후에 동서가 통합된 유럽은 진정으로 휴식에 들어갔다. 유럽인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보호하에 평화의 소비자였다. 그리고 미국의 마샬 플랜으로 회복한 뒤 성장을 계속한 경제적 풍요 속에서 물질적 소비자가 왕인 안락한 삶을 살아왔다. 그들은 참으로 안전한 민주주의 속에서 헤도니즘에 젖어 있었다.

1648년 이후 약 400년간 전쟁과 국제평화조약체결, 즉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였던 유럽이 냉전의 시기를 거치고 또 냉전 종식과 함께 1990년 11월 유럽의 34개국 국가원수나 정부의 수반들이 모여 유럽의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단결'을 약속한 파리헌장의 출범으로 유럽은 진실로 거의 200년 만에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가 마침내 수립된 것 보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NATO 정상회의에서 유럽회원국들이 약속한 군비지불을 지키지 않는다고 질타했을 때 유럽인들은 한결같이 비웃었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러-우전쟁으로 유럽은 다시 새로운 동작에 접어들었다. 우-러 전쟁은 사실상 전 유럽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2022년 2월 발생한 우-러 전쟁이 계속되자 유럽 국가들은 보유하고 있는 낡은 무기들을 마치 쓰레기 하치장에 버리듯 우크라이나에 아낌없이 퍼주고 자기들은 새 첨단무기로 신속히 재무장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유럽의 평화는 러시아의 일격에 무참히 깨져버린 상황에서 과연 유럽의 민주주의는 안전할 수 있을까? 1900년에 '선거 민주주의'라고 적합하게 분류될 수 있는 민주국가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Freedom House, 2000). 사뮤엘 헌팅턴은 그의 고전적 저작인 《제3의 물결: 20세기말의 민주화》에서 어떤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서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다소 덜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성인 남성의 50%가 투표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 기준에 입각하여 그는 미국을 1828년에야 민주주의로 분류하고 또 스위스와 영국, 해외 영국의 자치령과 프랑스, 그리고 여러 보다 작은 유럽 국가들이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민주주의로 이행했다고 판단했다. 헌팅턴의 이런 헐렁한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비교적 소수의 국가들에게 국한되었다. 이 숫자는 전쟁 후에 상당히 늘어났지만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국가도 전쟁 간 민주주의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 파시즘의 부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민주주의는 유럽대륙이 나치의 지배하에 떨어짐으로써 유럽의 대부분에서 사라졌다.

나치스가 패배한 뒤에 서유럽의 많은 곳에서 민주주의가 다시 등장했지만 중유럽과 동유럽은 소련 공산제국하에 들어갔다. 남부 유럽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그리스가 1970년대 중반에 가서야 민주정부로 복귀했다. 1989-1990년 소련 공산제국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야 유럽 대륙의 대부분에서 혹은 전 소련 국경선의 서쪽에 있는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20세기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전체적으로 자유로워진 유럽으로 막을 내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20세기에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철학자이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처럼 '민주주의의 부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세기에 걸친 유럽의 민주주의로의 여정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엄청난 유럽인들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동시에 유럽은 두 개의 괴물 같은 공산주의 전체주의와 나치스 전체주의를 탄생시켰다. 유럽은 민주주의의 해안에 도달하는 것이 그 여정의 참혹한 비용의 가치가 있는지를 분명히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가 끝나면서 적어도 당장은 20세기의 종말이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민주주의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방법에서 점점 더 많이 중심적 양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유럽경제공동체라고 불리는 것을 수립하는 1957년 로마조약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도 않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실상 유럽연합을 창설한 1992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는 조약체결 당사국들이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의 존중과 근본적 자유들과 법의 지배의 원칙들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조약의 서문의 첫 항목들 중 하나에서 '확인'했다. 더 나아가, 1993년 6월에 유럽위원회에 의해서 규정한 EU 회원자격의 코펜하겐 기준은 처음에 다음의 정치적 조건을 명시했다. "회원자격은 후보 회원국이 법의 통치, 인권과 소수자들에 대한 존중과 보호를 보장하는 제도의 안정을 달성했다는 것이 요구된다." 유럽을 위한 헌법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대회를 시작한 2002년 라켄 선언에서 민주주의적 정통성의 부족이 유럽연합의 가장 중대한 약점으로 인용되었다. 2004년 이 대회에서 등장한 헌법초안의 서문에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발전시킨 유럽의 유산을 기록했다. 그 초안은 비준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 동일한 단어는 로마조약을 수정하는 2007년 리스본 조약에 포함되었다. EU의 외교정책도 점차로 민주주의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오늘날 자신들의 민주주의의 상태에 행복해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유럽 국가에서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진정한 두려움을 발견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유로존의 위기와 여러 분야에서, 즉 빈혈적 경제성장, 대규모 빚, 줄어든 군사력, 암울한 출산율 그리고 대규모 이민자들의 동화 등 증가하는 문제 속에서 유럽의 퇴락이 예상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프랑소와 프레가 지적했던 것처럼, 시민들에게 잠재적으로 무제한적 자유와 평등을 약속하는 현대 민주주의는 기대와 성취 사이에 거대한 간격을 발생시킨다. 경제적 불평등은 그것을 축소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증가하는 수명과 낮은 출생률은 지속적인 복지 혜택의 향상을 어렵게 할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은 그동안 잊었던 자국의 재무장이라는 국가적 도전에 모두가 직면하고 있다. 이제 유럽에서 휴식은 끝났다. 이제 시작된 동작은 머지않아 유럽에서 혼란과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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