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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60> 근대화 도시의 그늘 ‘돌아가는 삼각지’

[대중가요의 아리랑] <60> 근대화 도시의 그늘 ‘돌아가는 삼각지’

기사승인 2023. 11. 0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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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랑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 삼각지 로타리를 헤매도는 이 발길/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눈물 젖어 불러보는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삼각지' 이 노래는 사모하는 여인을 만나지 못한 채 삼각지 로타리를 흐느끼며 돌아가는 남자의 비련을 담았다.

1960년대 산업화를 지향하는 수도 서울에도 빛과 그늘이 공존했다. 시대의 거울인 대중가요는 이 같은 도시의 두 얼굴을 어김없이 대변했다.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에 도시의 화려한 풍경과 희망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면,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에는 우수와 비애가 짙게 스며있다. 그러나 배호가 낮은 성음으로 노래한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에도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이 녹아있었다.

트로트 문법을 차용했지만 배호의 노래는 여느 트로트와는 결이 달랐다. 뭔가 차원이 다른 느낌을 발산했다. 중저음의 직선적인 목소리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겼다. 가슴을 파고드는 남저음이 최고의 장점이자 특징이었지만, 고음에 주목하는 팬들도 많았다. 성대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오는 고급스러운 목소리에 매료된 것이다. 배호는 그렇게 당대 최고의 '록 스타'로 부상했다.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하게 된 것도 각별한 인연의 결과였다. 가수 남진과 남일해가 바쁘다며 취입을 거절했고, 금호동마저 노래를 탐탁잖게 여기면서 돌고 돌아 작곡가 배상태의 먼 친척 조카인 배호에게 넘어온 것이다. 배호는 쓸쓸한 분위기가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며 곡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착공한 삼각지 입체교차로 건설공사와도 맞물리며 '돌아가는 삼각지'는 빅 히트곡이 되었다.

광복군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배호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 배호는 극장에서 드럼을 치며 리듬감을 익혔는데, 그의 음악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외삼촌이자 악단의 밴드마스터였던 작곡가 김광빈이었다. 22세 때 '굿바이' 등이 담긴 데뷔 음반을 낸 것도 외삼촌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악사로 활동하다가 가수로 데뷔한 대표적인 사례가 된 것이었다.

중절모를 쓴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로 무장한 배호의 모습은 40대의 중년 남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은 중후한 목소리에 걸맞게 나이가 들어보이게 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배호는 서른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가수다. 최고의 히트곡 '돌아가는 삼각지'가 나온 후에도 '안개 낀 장충단공원' '누가 울어' 등을 잇달아 터트리며 음악 인생의 탄탄대로를 열었지만, 심신은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인기 가수로 바쁜 스케줄이 1966년 시작된 신장염을 악화시키면서 노래를 부를 때 숨이 찰 지경이었다. 그래도 노래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차라리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처절한 호곡성이었는지도 모른다. 1971년 11월 감기몸살로 드러누운 불세출의 저음 가수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물아홉 살 한창 나이에 자신의 죽음을 내다본 '마지막 잎새'와 '0시의 이별'을 남기고 기어이 생을 마감했다.

배호의 육신은 고적한 가을 낙엽으로 떨어져 갔지만, 애절한 영혼의 격정적인 울부짖음은 아직도 대중의 가슴에 선연히 남아있다. 배호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매력적이고 감미로운 저음과 고음을 지녔던 전설의 가수였다. 노래의 유명세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던 '돌아가는 삼각지'의 입체교차로도 가수의 생애처럼 짧은 27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고 이제는 지하철 교차역 이름으로만 남았다.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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