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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외교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별세...NYT “전세계적 죽음·전쟁 초래 비난 많아”

영욕의 외교가,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별세...NYT “전세계적 죽음·전쟁 초래 비난 많아”

기사승인 2023. 11. 30.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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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별세...향년 100세
닉슨-마오쩌둥 정상회담 성사 주도, 미·중 수교 발판
미·소 데탕트 주도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로 노벨평화상, 2년 후 공산화
시진핑 "중국 인민의 오랜 좋은 친구"
키신저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이 2019년 7월 29일(현지시간)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에서 진행된 국무부 창설 230주년 기념행사에서 좌담을 하고 있다./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워싱턴 DC 메리어트 워드맨 파크에서 미중재계회의와 미중관계전국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기업 및 정책 지도자 오찬에서
아시아투데이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미국과 중국의 외교 정상화와 미·소 데탕트, 그리고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 등을 주도해 평가가 엇갈리는 미국 외교계의 거목 헨리 키신저 전 국무부 장관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100세.

키신저 전 장관의 국제외교정치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어츠'는 이날 "존경받은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헨리 키신저가 코네티컷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별세...향년 100세

고인은 리처드 닉스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1969~1973년)과 국무장관(1973~1974년)직을 겸직했다. 이어 는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뒤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두 자리를 계속 겸직하다 1975년 11월 국가안보보좌관에서는 물러나고,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의 4분의 1이 넘는 12명의 대통령에게 자문을 제공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겸직한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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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왼쪽)과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971년 2월 10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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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왼쪽)과 헨리 키신저 국무부 장관이 1973년 9월(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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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왼쪽)과 헨리 키신저 국무부 장관이 1975년 1월 12일(현지시간)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AFP·연합뉴스
◇ 닉슨-마오쩌둥 정상회담 성사 주도, 미·중 수교 발판...미·소 데탕트 주도

그는 1971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해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주석 간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양국은 1979년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고인은 마오부터 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까지 중국의 지도자를 상대한 유일한 미국인이라는 평가도 받는다고 NYT는 전했다.

이러한 친중 행보는 미·중 갈등 속에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논란이 됐다.

키신저 전 장관은 소련과의 데탕트 전략으로 1969년부터 전략무기제한협정 협상을 주도해 1972년 협정을 맺는 데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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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73년 11월 2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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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73년 2월 17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AFP·연합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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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왼쪽)와 헨리 키신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971년 7월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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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95년 10월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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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11년 1월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메리어트 워드맨 파크에서 진행된 미·중 기업 및 정책 지도자 오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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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15년 9월 22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 베트남 평화협정 체결 주도로 노벨평화상 수상 2년 후 공산화, '키신저 외교' 치욕의 역사

키신저 전 장관은 특히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남·북 베트남, 그리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간 평화협정 체결을 주도해 그해 레둑토 북베트남 정치국원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2년 후인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하면서 협정 체결 주도는 그에게 치욕적인 역사가 됐다.

그는 4차 중동전쟁(1973년) 때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아랍국가를 오가면서 중재 외교를 벌였으며, 이 일은 '셔틀 외교'라는 말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75년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4자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또 한국을 여러 차례 찾아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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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스 미국 대통령(오른쪽 두번째)과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1972년 5월 29일(현지시간)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나오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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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왼쪽)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73년 10월 21일(현지시간) 소련 모스크바에서 대화하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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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왼쪽부터)·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부 장관이 1975년 7월 31일(현지시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핀란드 헬싱키를 방문, 미국대사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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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007년 7월 1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노보 오가료뵤 관저에서 대화하고 있다./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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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과 레둑토 북베트남 정치국원이 1973년 1월 2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과 남·북 베트남, 그리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 간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악수하고 있다./AFP·연합뉴스
◇ NYT "소셜미디어에 전 세계적 죽음·전쟁 초래 외교정책 비난 많아"

NYT는 소셜미디어 엑스(X)에 키신저 전 장관이 과거 전 세계적으로 죽음과 전쟁을 초래한 외교정책을 옹호했다는 비난이 많았다고 전했다.

NYT는 "키신저 전 장관만큼 뜨겁게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외교관도 드물다"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국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미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외교를 새롭게 짠 극단적 현실주의자(ultrarealist)로 칭송을 받는 동시에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심지어 인권 분야에서도 미국의 가치를 버렸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고인은 유대인 출신으로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 15세가 되던 해인 1938년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1954년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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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오른쪽)과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73년 11월 7일(현지시간) 이집트 카이로의 타히라궁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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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대처 영국 보수당 당수(왼쪽)와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75년 9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국무부 발코니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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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왼쪽)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1989년 3월 17일 일본 도쿄(東京) 호텔에서 진행된 심포지엄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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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9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워싱턴 D.C. 국무부 청사에서 진행된 국무부 창설 230주년 기념행사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악수를 하고 있다./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시진핑 국가주석 "고인,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좋은 친구"...푸틴 러 대통령 "뛰어난 외교관, 선견지명 정치가"

키신저 전 장관의 별세에 전 세계 지도자는 추모 메시지를 발표했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시 주석이 중국 정부와 중국 인민을 대표해 개인 명의로 키신저 박사 별세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고, 가족에 진심 어린 위로를 전했다"고 보도했다.

시 주석은 조전에서 "헨리 키신저 박사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전략가이자 중국 인민의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 하오펑유(好朋友·좋은 친구)"라며 "반세기 전에 그는 탁월한 전략적 안목으로 중미 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역사적인 공헌을 했고, 이는 양국에 이익이 됐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꿨다"고 평가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미국이 외교 문제에서 가장 신뢰할 만하며 뛰어난 목소리 가운데 하나를 잃었다"며 애도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키신저 전 장관에 대해 "어린 유대계 소년으로 나치를 피해 달아나 미군에서 그들(나치)에 맞서 싸운 남자를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며 "난민이었던 그가 나중에 국무장관에 임명된 것은 미국의 위대함만큼이나 그의 위대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렘린궁 홈페이지에 올린 애도문에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존경받는 권위를 누렸던 뛰어난 외교관이자 현명하고 선견지명 있는 정치가가 세상을 떠났다"고 추모했다.

푸틴은 키신저 전 장관이 구소련과 미국이 데탕트를 달성하고 중요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게 실용주의 노선을 폈다는 점도 상기했다.

닉슨 전 대통령의 딸인 트리샤 닉슨과 줄리 닉슨는 "미국의 가장 노련한 외교관 중 한명이 별세한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키신저 전 장관이 냉전 종식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고인의 대중 외교를 비판해 온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엑스에 "장관 재임 기간 그가 건넨 품위 있는 조언과 도움에 항상 감사할 것"이라며 "그는 항상 힘이 되고 해박하기에 매번 대화하고 나면 그의 지혜로 나는 더 준비되고 나아졌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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