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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 칼럼] 한국인이 기억해야 할 미국인: 호머 헐버트

[이효성 칼럼] 한국인이 기억해야 할 미국인: 호머 헐버트

기사승인 2023. 08. 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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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주필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년 1월 26일~1949년 8월 5일). 그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미국인이다. 안중근 의사도 1909년 여순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면 그는 기꺼이 한국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1886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의 신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조선의 말과 글, 한국 문화와 역사를 국제적으로 소개하여 조선을 문명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고종의 특사로 활약한 후 일본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가 언론 회견과 기고, 집회와 강연으로 "한국 독립 운동의 횃불이자, 어떤 결사체 못지않은 대일 항쟁의 화력"[김동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363쪽]으로 여생을 보냈다.

헐버트는 미국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려고 유니온 신학대학에 재학 중 한국과의 운명적 인연으로 조선에 왔다. 조선이 개방과 근대화로 격동하던 때에 근대화 계획의 일환으로 세운 조선 최초의 신식 관립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한글에 매료되어 훈민정음을 부활시키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열심히 공부하여 깊이 음미하였으며, 교육만이 살길이라는 신념으로 한국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그는 교육과 한글에 대한 열정으로 조선에 온 지 3년 만에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士民必知·양반과 평민이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는 뜻)를 저술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학술적으로 고찰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그는 또 ①한글 ②이동식 금속활자 ③거북선 ④현수교 ⑤폭발탄을 한민족의 위대한 5대 발명품으로 소개했다. 말년에 그는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에 속한다"며 그 증거로 ①완벽한 소리글자 한글의 발명 ②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만든 철갑 거북선의 일본 격파 ③임금이 국사를 편견 없이 기록한 역사 기록 문화 ④기원전 1122년 한족 5000명을 이끌고 넘어온 기자(箕子)의 무리를 토착화한 이민족 흡수 문화 ⑤1919년 3·1혁명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충성심을 들었다.

헐버트는 교육자, 학자일 뿐만 아니라 행동가이기도 했다. 헐버트는 1895년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년에는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헌정한 《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헐버트의 특사 활동은 일본의 갖은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에 좌절하지 않고 미국에 귀국하여 "한국은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00편 가까운 기고, 1000회의 강연, 5000건의 언론 기사가 증거 하듯, 맹렬한 한국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그는 일제에 도둑맞은 고종의 내탕금 반환 운동까지 펼쳤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일본의 학정을 알렸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그의 그런 활동은 한국인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애국심과 단결심을 유발했다.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은 스승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헐버트를 광복절에 국빈으로 초청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였으나 다음 날 청량리 위생병원에 몸을 의탁했고 그곳에서 8월 5일 서거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하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더 원한다"고 했었고, 소원대로 한국(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혔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1950년 3월 1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그리고 2014년 10월 9일 한글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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