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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0> 무상한 세월의 서정 ‘낙화유수’

[대중가요의 아리랑] <20> 무상한 세월의 서정 ‘낙화유수’

기사승인 2022. 12.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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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 얽어 지은 맹세야/ 세월에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이 강산 흘러가는 흰 구름 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 나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포구로 가자'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일제의 군국가요가 판을 치던 1942년 '서정곡의 대표작'이라는 광고와 함께 유성기 음반으로 나온 당대의 히트곡이다.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는 월북작가 조명암이 작사하고 이봉룡이 작곡했다. 작곡가 이봉룡은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오빠이다. 이난영은 남인수의 첫사랑이다. 남인수는 이난영을 평생 잊지 못했고 6·25 전쟁 때 그녀의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자 재회했다. 그러나 자신의 건강악화로 늦은 만남 또한 오래 가지 못했다. 세월과 삶이란 이렇게 무상한 것인가.

오가는 봄과 속절없이 흘러가는 청춘을 대비하면서도 서정성을 갖춘 대중가요 '낙화유수'는 노래를 부른 남인수의 삶을 닮았다. '낙화유의수유수(落花有意隨流水) 유수무의송낙화(流水無意送落花)'라고 했다. '떨어지는 꽃은 뜻이 있어 물 따라 흐르지만, 흐르는 물은 무심히 꽃잎을 흘려보낼 뿐'이란 뜻이다. 노래는 그 무상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관조하는 달관의 경지마저 엿보인다.

작사가 조명암의 삶도 낙화유수였다. 가난한 어린 시절과 출가의 인연을 지닌 문인이다. 문장력이 뛰어나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詩)와 대중가요 작사가 동시에 당선되었다. 일본 유학 후에도 작사에 주력해 김다인, 이가실, 금운탄 등의 예명으로 '고향초'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꿈꾸는 백마강' 등 400여 곡의 노랫말을 지었다. 해방 후 월북하는 바람에 그가 작사한 곡들도 파란을 겪는다.

'낙화유수'도 금지곡의 신세가 되자 1950년 반야월이 가사를 고치고 작사가 필명을 바꿔 노래의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낙화유수'는 정처 없는 작사가의 인생유전처럼 노랫말 또한 일정하지가 않다. 중국 당나라의 시문에서 유래한 '낙화유수'는 보편적으로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을 일러 봄이 가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필자 또한 '낙화유수'와 관련된 특별한 추억이 있다.

대구 향촌동에서의 일이다. 향촌동은 특별한 역사와 정서를 지닌 곳이다. 6·25 전쟁으로 몰려든 피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달랬고, 삶의 고뇌와 문화예술에 대한 꿈을 한 잔 술에 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오상순, 김팔봉, 마해송, 조지훈, 박두진, 구상, 최정희, 최태응, 박인환, 김수영 등의 문인과 작곡가 김동진, 화가 이중섭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명사들이 전란의 애환을 몸소 겪은 곳이다.

당시 향촌동은 우리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다. 지금도 그들이 뿌려놓은 숱한 일화가 스며있다.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포연에 이지러진 시대, 그 허무의 강을 여울처럼 흐르다 간 사람들의 여정을 찾아 향촌동을 수도 없이 서성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향촌동 시대'라는 제목으로 그 낭만적 일화를 신문에 연재하기 위해서였다.

취재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동행한 원로 작가 윤장근 선생과 함께 그의 옛 단골집에 앉았다. 초저녁부터 기울인 술잔에 주흥이 도도해진 노작가는 남인수의 '낙화유수'를 불렀다. 그 애잔한 가락에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무상감에 젖어들었다. '낙화유수'의 노래를 접할 때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분의 목소리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올해도 꽃잎은 떨어지고 물 따라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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