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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21>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꿈 ‘귀국선’

[대중가요의 아리랑] <21> 광복의 기쁨과 귀향의 꿈 ‘귀국선’

기사승인 2022. 12. 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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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소리 건설은 크다' 이보다 더 광복의 기쁨과 귀국의 희망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노래는 없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드높았다. 아리랑과 애국가를 부르면서 귀국선에서 내린 해외 동포들의 눈물 어린 재회의 광경을 작사가 손로원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것은 새 나라 건설을 위한 희망의 찬가이기도 했다. 갈매기가 웃고 파도가 춤출 정도로 감격스러운 장면이었다. 그 주체할 수 없는 감흥을 노랫말로 옮긴 것이다. '귀국선'은 해방의 벅찬 감회를 마음껏 표현한 가요였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에 맞서 해외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운동을 하거나,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온갖 풍상을 겪고 살아온 동포들의 심경이야 오죽했을까. 민족 사학자 위당 정인보 선생은 광복절 노랫말에서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며 광복의 소회를 토로했다.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이루어진 해방의 감격과 환희는 여러 해에 걸쳐 우리 대중가요의 중심 테마가 되었다.

'4대문을 열어라' '해방된 역마차' '럭키 서울'에 이어 등장한 노래가 '귀국선'이다. 하지만 오랜 타국 생활을 미련 없이 버린 채 자주독립국 건설의 부푼 꿈을 안고 귀국선에 오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200만명, 중국과 러시아에 200만명가량의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끝내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그래서 귀국선이나 귀국 열차에 몸을 실은 동포들의 감회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귀국선 노랫말에는 그 같은 망국민의 한과 새 나라 건설의 꿈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그렇게 귀국선에 몸을 싣고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막상 국내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분단과 전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선구자적인 민족 지도자들이 광복의 기쁨에 앞서 깊은 탄식과 우려를 피력한 이유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8·15 해방을 두고 김구 선생은 "올 것이 너무 빨리 왔다"고 통탄을 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한 광복의 한계성을 간파한 것이다. 함석헌 선생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당혹감을 드러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 1945년 대한민국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산하 낙하산 부대까지 편성해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일본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우리 광복군이 국내에 상륙해 항일전쟁에 불을 당긴 후에 일본이 항복을 했더라면 우리의 운명을 또 달라졌을 것이다. 김구 선생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한 이유이다.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명분의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분할 점령이 동족상잔의 발단이 되고 만 것이다. 아무튼 '귀국선'은 대중의 호응도나 가사의 상징성에서 광복 후 시대 정서를 대변하는 수작이었다.

'귀국선'은 가수 신세영이 불렀다가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이인권이 재취입하여 크게 히트했다. '제2의 남인수'란 별명을 지녔던 이인권은 1940년 '꿈꾸는 백마강'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데 이어 해방 후 '귀국선'을 부르면서 인기 가수의 위치를 굳혔다. 작사가 손로원도 '귀국선' 성공을 계기로 수많은 히트곡의 노랫말을 지으며 한국 대중가요계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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