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대중가요의 아리랑] <28> 영원한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

[대중가요의 아리랑] <28> 영원한 진중가요 ‘전우야 잘 자라’

기사승인 2023. 02. 12. 17:5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가수 현인이 부른 '전우야 잘 자라'는 6·25 전쟁기를 풍미한 진중가요(陣中歌謠)였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 해방정국의 혼란과 분단은 기어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상잔의 참극이었다. 전란의 상처는 넓고도 깊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명에 가고 고향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신음과 통곡이 강산을 뒤덮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파생된 실향과 이별 그리고 방황이 1950년대를 지배하는 어두운 시대정서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 까닭이다.

대중가요는 역사의 현장이고 시대의 거울이다. 당대의 풍경과 서정을 곡진하게 그리며 노래한다. 1950년대의 대중가요 역시 그랬다. 전쟁의 비극과 상흔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적 소명이었다. 전란의 아픔 속에서도 명곡이 탄생하는 것은 정녕 역설인가. 암울한 식민지 시대에 주옥같은 노래를 만들어 대중을 위로했던 작곡가 박시춘의 음악적 영감은 전쟁의 비감 속에 더욱 고조되었다.

'전우야 잘 자라'는 9·28 수복 직후 서울 명동에서 우연히 만난 작사가 유호와 박시춘이 국군의 사기진작과 정서함양을 위해 하룻밤에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기의 걸작 중 첫 작품이었다. 이 노래는 공식적인 군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가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진중가요'라고 부른다. 노래는 전쟁의 포화 속에 있던 전방의 군장병은 물론 후방의 온 국민이 즐겨부르는 군가가 되었다.

'전우야 잘 자라'는 군가 이상의 군가이다. 진격과 승리의 다짐 일변도인 여느 군가들과는 달리 전선에서의 불가피한 죽음의 비애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더 진한 감동을 전한다. 그래서 6·25전쟁을 대표하는 최고의 진중가요로 남아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승전결을 노래로 담아낸 탁월한 작곡가 박시춘이 "좋은 군가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라고 한 말을 실증한 것이다.

'전우야 잘 자라'는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며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에 나서며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거듭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승전을 고무하는 군가와 다름없는 박진감 있는 리듬에 '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등의 처연한 가사를 실어 전쟁의 비극적 감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이 위태롭던 그 절체절명의 전황을 반전시키고 북진하는 시점에 나온 진중가요여서인지 '전우야 잘 자라'는 뜻밖에도 단조로 이루어져 있다. 1·4 후퇴로 국군이 퇴각할 때는 금지곡으로 지정되며 노래를 만든 사람들이 이적행위자로 몰릴 뻔한 촌극도 벌어졌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가 문제가 된 것이다. 패배의식을 조장한다는 지적이었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한다는 각오를 서정적으로 응축해 표현한 것이라는 진정성이 받아들여져 다행히 휴전 후에는 복권이 되었다. '전우야 잘 자라'는 북진의 벅찬 감동과 스러져 간 전우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이 노래는 전쟁으로 좌절하고 상처입은 국민들에게도 희망과 위로를 전한 영원한 군가로 남아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