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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35> 이국 정서의 유행 ‘페르샤 왕자’

[대중가요의 아리랑] <35> 이국 정서의 유행 ‘페르샤 왕자’

기사승인 2023. 04. 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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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별을 보고 점을 치는 페르샤 왕자/ 눈 감으면 찾아드는 검은 그림자/ 가슴에다 불을 놓고 재를 뿌리는/ 아라비아 공주는 꿈속의 공주/ 오늘밤도 외로운 밤 별빛이 흐른다// 약해서야 될 말인가 페르샤 왕자/ 모래 알을 움켜 쥐고 소근거려도/ 어이 해서 사랑에는 약해지는가/ 아라비아 공주는 마법사 공주/ 오늘밤도 혼을 빼는 촛불이 꺼진다' 이 노래는 페르샤 왕자와 아라비아 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이국적인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페르샤 왕자'는 한복남이 작곡하고 가수 허민이 부른 이슬람풍의 노래이다. 점을 치는 왕자와 마법사 공주 등장에 부응하듯 전주의 현란한 악기 연주가 이미 신비스러운 전설 속으로 이끈다. 이 같은 노래는 전후 미군을 통한 서양음악의 수용이란 문화적 충격과 시대적 부산물이긴 하지만, 우리 가요의 다양성과 개방성 확대에 기여한 점 또한 부인할 수는 없다.  

일반 대중의 해외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하던 1950년대에 중동은 우리에게 달나라 만큼이나 심리적으로 먼 곳이었다. 그쪽에 존재한 나라 이름 또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가 떠오를 정도였다. 하물며 중동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노래의 내용처럼 페르시아 왕자와 아라비아 공주가 실제로 사랑을 나눴을 가능성은 없었다고 봐야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보다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가문의 갈등은 같은 이탈리아의 같은 베로나 지역에서 옥신각신했을 뿐 같은 종교를 믿는 같은 민족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는 전혀 다른 민족에다 비록 같은 이슬람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시아파와 수니파로 갈라져 차라리 타종교보다도 더 증오하는 사이가 아닌가.

어쩌면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천년의 사랑' 이야기가 더 현실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서기 650년경 아비틴이라는 페르시아 왕자가 나라가 망하자 중국을 거쳐 신라에 오게 되었고, 신라 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공주를 데리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영국 국립도서관에서 발견된 '쿠쉬나메'라는 고대 이란 서사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는 경주의 고분에서 페르시아형 유리 제품이 발굴되었고 신라 38대 원성왕릉인  괘릉을 지키는 무인 석상이 페르시아인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을 더한다. 아무튼 이같은 이국정서의 가요가 등장한 것 또한 시대정서의 반영이었다. 전쟁의 고통과 전란의 혼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해 대중은 이국적 분위기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것은 전후 외국 선율의 급속한 유입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중가요의 이국정서 표출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 주로 만주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유랑의 노래들이 멀리 동남아와 유럽까지 확장된 것이다. '하얼빈 다방' '북경의 달밤' '안남 아가씨' '베니스의 노래' 등이 그것이다. 해방 후 1950년대에는 미국의 팝 음악이 우리 가요의 한 갈래를 장식하면서 이국 취향적 욕구가 미국뿐만 아니라 홍콩·인도·중동 등 아시아권과 유럽으로 다시 확산되었다.

'럭키 서울'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홍콩 아가씨' '인도의 향불' '내가 울던 파리' 등의 노래가 전후의 피폐한 대중의 심리를 달래준 것이다. 그것은 고단한 현실을 잊고 싶은 일종의 도피의 수단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 허민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인물이었다. '백마강' 등 몇 곡이 흥행하는가 싶더니 무슨 까닭에서인지 무대에서 멀어져갔다. 허민의 음악인생 또한 그의 노래처럼 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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