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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36>풍류가객의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

[대중가요의 아리랑] <36>풍류가객의 노래 ‘방랑시인 김삿갓’

기사승인 2023. 04. 09.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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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논설위원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이 노래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역사 속 풍류가객 김삿갓의 방랑 행적을 소재로 삼았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 대대로 고관대작의 벼슬이 끊이지 않았던 안동김씨 명문가의 후손이다. 그런 김병연이 조선팔도를 떠돌며 부평초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은 1811년 평안도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화근이었다.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이던 조부 김익순이 반란군에 투항하면서 집안이 멸족의 위기에 놓이자 어린 김병연 형제는 하인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몇 년 후 형벌이 경감되자 어머니는 아들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 학문에 힘쓰도록 했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김병연은 영월관아에서 시행한 향시(鄕試)에서 당당하게 장원을 했다. 운명의 장난이던가, 시제(試題)가 다름아닌 '김익순의 죄를 통탄'하는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그 김익순이 바로 자신의 친조부라는 얘기를 들었다.

통한의 눈물과 함께 깊은 절망감과 죄책감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 김병연은 기어이 집을 나섰다. 하늘을 쳐다보기가 차마 부끄러워 삿갓을 눌러썼다. 대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35년 방랑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스물두살에 '김삿갓'이 되었다. 행운유수(行雲流水)로 떠돌면서 후박(厚薄)한 인심을 두루 겪었으며 가는 곳마다 풍자와 해학이 어우러진 파격적인 시풍과 기행으로 숱한 전설을 남겼다.

방랑의 행로는 전남 화순 동복에서 멈췄다. 적벽강 위 일엽편주 안에서 천재 시인은 저멀리 흰구름을 올려다보며 홀로 눈을 감았다. '돌아가기도 어렵지만 머물기도 어려워라(歸兮亦難佇亦難) 길 위를 해매인 것이 몇해이던고(幾日彷徨中路傍)' 김삿갓이 형벌같은 세월을 구름처럼 물결처럼 떠돌면서 고단한 일생을 마지막으로 되돌아보며 남긴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의 끝 구절이다. 

공교롭게도 대중가요 '방랑시인 김삿갓'은 김삿갓이 귀천(歸天)한지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 나왔다. 노래를 부른 명국환은 김삿갓이 어린 시절 한때 머물렀던 황해도 출신으로 일찍이 가수의 소질을 보였다. 1.4 후퇴 당시 가족과 헤어지면서 홀로 월남해 서부전선 정훈공작대원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극단에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명국환의 데뷔곡은 1954년 발표한 '백마야 울지마라'이다. 
악극단에서 만난 같은 월남인 가수 겸 배우 나애심(본명 전봉선)이 자신의 오빠를 소개했는데 그가 바로 명국환과 명콤비를 이루게 되는 작곡가 전오승이다. 이들은 '방랑시인 김삿갓'이란 히트곡에 이어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와 이국적인 가사와 멜로디인 '아리조나 카우보이' 등을 잇따라 발표하며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명국환의 인생도 김삿갓을 닮아서인지 방황과 굴곡이 없지 않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일본 영화 주제가를 일부 표절했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 금지곡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 분주한 삶 중에도 거듭 결혼에 실패한 것을 두고 팔자소관이라 여기기도 했다. 원로가수로 홀로 지내면서도 김삿갓에게 시가 있었듯이 자신은 노래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했다. 김삿갓이 남긴 싯귀처럼 '만사의 운명은 다 정해져 있거늘, 뜬구름 같은 인생 부질없이 바빴던가(萬事皆有定 浮生空自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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