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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38> 전쟁의 참상 ‘단장의 미아리고개’

[대중가요의 아리랑] <38> 전쟁의 참상 ‘단장의 미아리고개’

기사승인 2023. 04. 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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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우리 역사상 6·25전쟁은 미증유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외세의 침략도 아닌 불과 3년 남짓한 남북 간의 동족상잔으로 5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00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파생되었다. 또한 민간인 사상자 비율이 전투에 나선 군인보다 더 높은 유례없는 최악의 전쟁이었다. 그것은 정규군의 대치가 아닌 학살과 보복의 악순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참상의 극치를 이룬다.

그 참혹한 희생을 치르고도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어쩌면 모두가 패자인 상황에서 휴전을 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은 것이다. 해방과 분단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민족의 시련은 70년이 지나도록 멍울진 채 지금껏 남북 간 적대성을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해 왔다. 이보다 더 큰 겨레의 아픔과 고통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동족 간의 전쟁은 결코 벌이지 말았어야 할 참변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창작과 예술혼을 불태운다. 전쟁 중에 탄생한 문학과 예술작품이 더 빼어난 명작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적 감성인가 초월적 이성인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은 비감 어린 노래를 낳았다. 한국전쟁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모진 상처는 우리 대중가요에도 선연히 남았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도 그 상징적인 노래 중의 하나이다.

휴전을 하고 3년이 지난 1956년 발표한 트로트곡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가요계의 전설인 반야월(진방남)의 애절한 가족사가 담긴 가사에 이재호가 곡을 붙이고 이해연이 부른 노래이다. 반야월은 9·28 수복이 되자마자 미처 피란을 하지 못했던 서울의 가족을 찾아갔는데, 다섯 살짜리 딸이 숨졌다는 비보를 접했다. 인민군을 피해 미아리고개를 넘던 중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는 것이었다.

넋이 나간 아내는 포연 속에 헐떡이다가 숨을 거둔 아이를 이불에 싼 채 호미로 땅을 파서 묻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단장(斷腸)의 아픔이었다. 반야월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화약 연기 자욱한 전장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철사줄에 묶인 채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사람들의 처연한 모습을 그렸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었거나 가족의 생사를 모르는 여인들의 애끊는 심정을 담았다.

미아리고개는 전쟁 당시 서울 동북방면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로 국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할 때 문인예술가와 지식인을 비롯한 수많은 납북인사들이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끌려간 곳도 미아리고개였다. 하물며 인공치하에서 마지못해 부역을 하거나 의용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거나 아예 좌익분자에게 처형당한 이름 없는 민초들의 고초는 어떠했을까.

반야월은 노랫말을 통해 개인적인 아픔을 민족의 보편적 참상으로 승화시켰다. 한국전쟁 당시 국토 4분의 3이 전쟁터였다. 곳곳이 '미아리고개'였을 것이다. 총성과 포연은 사라졌지만 이 땅에 남은 상처는 깊었다.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전쟁이 짓밟고 간 상흔을 어루만져 주었다. 실제 미아리고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반야월이 남긴 비극적 서정가요는 여전히 우리 가슴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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