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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45> 가요시의 절창 ‘세월이 가면’

[대중가요의 아리랑] <45> 가요시의 절창 ‘세월이 가면’

기사승인 2023. 07. 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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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은 문학과 음악이 어우러져 빚어낸 절창이다.

노래의 가사는 시(詩)를 많이 닮았다. 간결하면서도 응축된 언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적당한 길이에 일정한 박자를 지켜야 하고 선율에 실어야 하니 노랫말은 시를 닮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쉬운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문학성을 지녔고 일정한 리듬감을 갖춘 시 또한 노래 가사로서의 활용가치가 높다. 김소월 시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김소월은 물론 정지용, 서정주, 장만영, 김광섭, 박인환 시인의 작품도 같은 맥락에서 명곡으로 거듭났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가장 많은 노랫말을 지은 조명암(조영출)은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시인이었다. 우리 가요의 금자탑을 쌓은 대다수 작사가들은 문인이었다. 1970년대 국민 작사가 박건호도 시인이었다. 가요계의 살아있는 역사였던 정두수도 시인이었고, 박영호와 왕평은 극작가였다.

음악과 문학은 숙명적인 관계인지도 모른다. 시가(詩歌)라는 명칭 자체가 시와 노래는 한통속임을 시사한다. 대중가요란 통속성과 상업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초월하는 명곡의 내면에는 문학성과 시적 감수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도시적 감각과 서정으로 사랑의 슬픈 추억을 노래한 명작이다.

전후의 상실과 비련을 낭만적으로 읊은 시로 그 쓸쓸한 정서가 가슴을 적신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이었던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탄생하고 노래로 만들어진 전설적인 일화도 전한다. 1956년 벽두에 시인 박인환과 가수 나애심 그리고 극작가 이진섭 등이 서울 명동의 대폿집 은성(銀星)에 모였다.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의 모친이 경영하던 술집이었다.

이 술자리에서 박인환이 즉흥적으로 시를 써 내려갔고 이진섭이 바로 곡을 붙여서 나애심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마침 술집 안에 있던 테너 임만섭이 큰 목소리로 불렀다는 얘기도 없지 않다. 한편으로는 단골 술집인 은성 여주인의 애절한 옛사연을 담아내면서 외상술값에 갈음했다는 사연도 전한다. 아무튼 1956년 블루스풍의 첫 음반이 나왔고 나애심은 '세월이 가면'의 원곡 가수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가 이봉구의 단편 '명동'에 나오는 내용으로, 명동시대를 재조명한 EBS 드라마 '명동백작'(2004년)에서도 소개되었다. 전후의 우수와 감성이 어린 그리고 인간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낭만시대의 한 장면이다. 전란에 지친 문인예술가들의 애수를 달래던 이 노래는 1959년 가수 현인이 녹음을 했고, 1970년대에는 통기타 가수 박인희의 청아하고 애잔한 목소리로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도시적인 비애와 인생의 고뇌를 감상적인 시풍으로 노래하며 주목을 끌던 시인 박인환은 1955년 첫 시집을 낸 이듬해에 29세로 요절했다. 소설가 이상의 기일을 맞아 사흘간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코올성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한다. 명시이자 명곡으로 남은 '세월이 가면'은 시인이 작고하기 일주일 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꽃피듯 왔다가 잎지듯 가는 세월이던가. 박인환의 세월도 그렇게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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