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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46> 정치 풍자의 변주곡(2) ‘유정천리’

[대중가요의 아리랑] <46> 정치 풍자의 변주곡(2) ‘유정천리’

기사승인 2023. 07. 0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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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빛이 젖어드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귀거래사(歸去來辭)풍의 영화 주제가였던 '유정천리'도 정치적 격랑과 마주했다.

'유정천리'는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59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였다. 영화는 시골생활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한 가족이 온갖 풍파를 겪은 후 되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전란의 후유증으로 더욱 피폐해진 도시의 삶과 집 나간 아내를 뒤로 하고 결국은 낙향의 길을 택하는 부자(父子)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전란이나 혼란이 가중될수록 귀향(歸鄕)의 모티브는 더 강하게 작동하기 마련이다.

아들의 손을 잡고 노을진 언덕길을 오르며 "가자!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내 고향으로"라고 다짐하는 마지막 장면에 관객은 눈시울을 붉혔다. 영화의 주제가 또한 반야월 작사, 김부해 작곡, 박재홍 노래의 '유정천리'였다. 노랫말에는 전후 사회의 혼란과 민초의 고달픈 삶이 투영되어 있다. 각박한 도시를 벗어나 인정이 남아있는 농촌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정치에 대한 염증과 혐오의 반영이었는지도 모른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신익희 추모 신드롬과 맞물린 '비 내리는 호남선'의 열풍은 끝이 아니었다. 4년 뒤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또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치료차 떠났던 미국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거듭된 비극에 상심한 학생들은 이번에는 '조병옥 애도가'를 기획했다. 바로 '유정천리'의 개사(改詞)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가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 네' 2.28 민주운동을 주도한 대구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가사를 바꾼 노래가 일반 대중에게 파급되면서 파장이 커지자, 교육 당국에서는 암암리에 학교장에게 단속을 지시하면서 학생들의 소지품까지 검사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3.15 부정선거가 불거지고 4.19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며 개사한 노랫말의 끝소절은 되레 '민주당에 꽃이 피네 자유당에 눈이 오네'로 바뀌기도 했다. 특히 학생과 시위대가 '유정천리' 개사 가요 부르기에 적극적이었다. 당시는 운동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고 보면 시위현장에서 유행하던 이 노래가 운동권 노래의 원조가 되는 셈인가. 대중가요가 품은 시대성과 역사성을 다시한번 확인한 것이었다.

4년 전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을 졸지에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던 국민들은 '유석(維石) 조병옥 박사 서거'라는 잇따른 비보에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똑같은 정치적 불운을 두 번씩이나 겪으며 격앙된 민심은 독재타도로 분출되었다. 노래는 자유당 종말을 촉구하는 운동가요가 되었다. 하물며 가수 박재홍이 무대에서 '유정천리'를 노래할 때 개사곡으로 불러달라는 관객의 요구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사 울고간다' 동학혁명 때 '파랑새요'가 있었다면 4.19 혁명에는 '유정천리'가 있었다고 할까. '유정천리' 노래는 4.19의 도화선이 되었다. 4.19 혁명을 추동하는 저력이 되었다. 대중가요는 당대의 정치상황을 예리하게 풍자하기도 한다. 한 곡의 유행가가 가져온 정치적 파급효과를 실감하면서 한국 사회는 일단 민주화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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