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대중가요의 아리랑] <50> 항구의 사랑과 이별 ‘삼천포 아가씨’

[대중가요의 아리랑] <50> 항구의 사랑과 이별 ‘삼천포 아가씨’

기사승인 2023. 08. 06. 18:29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비 내리는 삼천포에 부산 배는 떠나간다/ 어린 나를 울려놓고 떠나가는 내 님이여/

이제 가면 오실 날짜 일년이요 이년이요/ 돌아와요 네 돌아와요 네 삼천포 내 고향으로// 조개껍질 옹기종기 포개놓은 백사장에/ 소꿉장난 하던 시절 잊었나 님이시여/ 이 배 타면 부산 마산 어디든지 가련마는/ 기다려요 네 기다려요 네 삼천포 아가씨는' '삼천포 아가씨'는 실제의 사연을 노래로 만든 것이다.

'삼천포 아가씨'는 다름 아닌 작사가 반야월의 오랜 친구 딸이었다고 한다. 경남 출신 작곡가의 딸이었던 삼천포 아가씨는 삼천포 여고를 졸업하고 같은 삼천포 출신의 대도시 명문대학생과 사귀었다. 방학 때마다 삼천포를 오가는 청년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고시 준비를 한다며 떠난 후 연락을 끊어버렸고 여인은 하염없는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1950년대 후반 삼천포에 약국을 차려놓고 남자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친구의 딸 모습에 반야월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약 없는 시간들에 지친 삼천포 아가씨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삼천포에 들른 반야월은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그만 서울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전히 "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반야월은 청순한 삼천포 아가씨의 애틋한 순애보에 다시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작곡가 친구가 타계하자 반야월은 가슴속을 맴돌던 상념들을 '삼천포 아가씨'란 노랫말로 정리했다. 반야월은 사연이 실화임을 강조하며 송운선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떠나간 임을 부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안타까운 여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가사를 받아든 송운선은 금방 악상을 가다듬었다.

'노래 따라 삼천리'라는 대중가요 이야기책을 펴낸 작사가 정두수는 "송운선은 애초에 노래를 은방울자매에게 준다는 생각으로 선율을 떠올렸다"고 했다. 노래는 떠나간 임에 대한 변함없는 여인의 정조였다. 구슬픈 가사와 애절한 곡조는 이별의 정한에 익숙한 한국인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은방울자매의 고운 음색이 노래에 얽힌 사랑과 이별의 서정을 더한 것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는 항구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대중가요가 많다. 거친 바다를 떠도는 뱃사람들은 항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래도 항구의 여성들은 꿈결처럼 다가와서 풋사랑을 남긴 채 떠나간 옛사랑을 그리워하기 일쑤였다. 항구에서의 만남은 애당초 부평초 인연이었다. 이별이 예고된 뜨내기 사랑이었다. 배가 드나드는 바다를 낀 항구의 숙명 때문이었다.

항구는 그런 이별의 상징적 공간으로 한국인의 감성에 스며들었다. 가요평론가인 김장실 전 문체부 차관은 "항구의 이별이 기차역보다 더 슬픔의 정조가 강렬하다"며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징병, 정신대와 위안부 등 비애의 역사가 배태한 민족적 정서의 울림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해방 후 마도로스와 항구의 여인과의 부박한 사랑과 이별은 차라리 낭만에 가깝다.

같은 항구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삼천포 아가씨'의 순정은 이와는 결이 다른 노래이다. 1964년 '삼천포 아가씨' 노래는 나오자마자 크게 히트했다. 노래는 그림 같은 항구 도시 삼천포를 전 국민에게 알리는 역할도 했다. 노래를 만든 사람들은 모두 갔지만 '삼천포 아가씨'의 애틋한 가사와 선율은 노래비와 동상 그리고 가요제로 명맥을 이어가며 항구의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전하고 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