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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53> 산업화 시대의 망향가 ‘고향무정’

[대중가요의 아리랑] <53> 산업화 시대의 망향가 ‘고향무정’

기사승인 2023. 09. 03.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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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 산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있고/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일세.'

'고향무정'은 우리 사회가 산업화와 도시화로 재편되던 시절 이농현상으로 피폐해져 가던 농촌의 모습을 애틋한 가사와 선율로 담아낸 망향의 노래이다. 게다가 저음 가수 오기택의 풍부한 성량과 구수한 음색이 각박한 도시에서 부평초 같은 삶을 이어가던 실향민들의 가슴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되살려 놓았다. 문전옥답이 잡초에 묻혀있고 어부들의 노래 소리가 멎은 고향에는 비감이 어려있다.

대중 미디어가 드물던 1960년대 '고향무정'을 들으면서 고향 생각에 젖어들고 실향의 아픔을 달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댓 줄의 가사와 압축된 리듬 속에 시대의 감성과 서민의 애환을 담고 한 시절을 풍미하는 대중가요의 저력이다. 그러고 보면 대중가요란 당시 사회를 세밀히 들여다보는 현미경이면서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조망하는 망원경의 기능도 함께 수행하는 듯하다.

'고향무정'이야말로 공동화와 고령화로 존폐의 위기에 놓인 오늘날 농촌사회의 모습을 예견한 신호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격동의 시대에 타향을 떠돌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고향은 유년의 추억이 머물러있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시절이 하 수상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타관을 떠도는 방랑자와 나그네의 심중에는 회한이 쌓이기 마련이다.

'고향무정'은 일제강점기 시문학동인으로 활동했던 김영랑, 박용철 시인의 고향에 대한 시적 감성과도 일맥상통한다. 비록 시대는 달랐지만 그 또한 가슴속의 고향을 잃어버린 상실감과 비애감의 토로였기 때문이다. 사실 '고향무정'의 노랫말은 함경북도 웅기가 고향인 작사가 김운하의 망향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본의 패망과 함께 북녘 땅에 진주한 소련군의 구둣발을 피해 38선을 넘어 월남한 사람이었다.

1966년 설날을 맞아 이북 5도민 망향제를 올리는 임진강을 찾았던 김운하는 흩날리는 눈발 속으로 북녘의 고향산천을 그림처럼 떠올리며 노랫말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 오기택이 '고향무정'을 취입하고 발표하면서 기록적인 판매 성과를 올렸는데 2년 후에는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남진과 문희가 남녀 주인공으로 열연한 합동영화사 작품이었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오기택은 고등학교 진학 때 서울로 올라왔다. 원로가수 고복수가 운영하던 가수 등용문인 동화예술학원을 수료한 후 1961년 KBS가 주최한 제1회 직장인콩쿠르에서 1등으로 입상하며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1963년 '영등포의 밤'으로 데뷔한 후 '고향무정'뿐만 아니라 '우중의 여인' '아빠의 청춘' '충청도 아줌마' 등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매력적인 저음 가수로 1960년대를 풍미했다.

오기택은 향토적인 노래와 함께 현대 도시인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도 많이 불렀다. 묘하게도 노랫말을 쓴 김운하의 고향은 한반도의 북동쪽 끝이었고, 노래를 부른 오기택의 고향은 남서쪽 끝이었다. 김운하는 끝내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오기택은 '고향무정' 노래비가 있는 고향으로 영원히 회귀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전 재산을 고향의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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