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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정의 씨어터토크]현대사회의 인간소외 다룬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현수정의 씨어터토크]현대사회의 인간소외 다룬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기사승인 2020. 11. 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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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공연예술제 통해 온라인 상영...영상에서도 흡입력 있는 무대 돋보여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중 한 장면./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
“저는 안했으면 싶습니다.”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박인혜 작창·소리, 임영욱 각색·연출)를 관람하고 나면 한동안 이 문장이 귓가에 맴돌 것이다. 뒷부분을 길게 늘이는 독특한 창법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의미심장함이 묘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 문장을 반복적으로 노래하는 인물은 타이틀 롤인 ‘바틀비’이다. 그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필경사로, 주 업무인 필사 이외의 모든 일을 거부한다. 문서들을 대조하는 일도, 다른 직원에게의 전달사항도, 문서의 매듭을 손가락으로 잠시 눌러달라는 부탁도 “안했으면 싶습니다”라며 일축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바틀비의 소극적이지만 치명적인 저항 때문에 대혼란에 빠진 변호사다. 그는 급기야 바틀비가 필사까지 거부한 채 사무실에 버티고 앉아 있는데도, 화를 낼 수가 없다. 차분하고 창백한 얼굴에 온화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안했으면…”이라고 이야기하면 이상하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독특한 인물은 왜 모든 일을 놓아버리고는 퇴사도 거부하는 것일까. 변호사를 비롯한 극중 인물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다. 이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주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힌트를 주는 오브제가 있으니, 공중에 매달린 커다란 모래주머니다. 이는 공연 내내 모래가 새어나오는 모습으로 도구처럼 일하는 가운데 (복사기 소리로 바틀비가 묘사되기도 한다) ‘소진되는’ 바틀비의 존재를 연상시키는데, 바틀비가 죽는 순간 남은 모래를 토해내며 터져 버린다. 모래주머니 아래 놓여 있는 빈 의자와 신발 역시 바틀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들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사실 바틀비의 행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작품의 원작은 1853년에 발표된 허먼 멜빌의 동명 소설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소외를 고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현대의 수많은 학자들은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바틀비에 대해 정치적 혹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시도했다. 중요한 것은 바틀비의 행위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사회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창작집단 희비쌍곡선__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 중 한 장면./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
원작의 서술은 무대 위에서 무형문화재 판소리이수자인 박인혜의 소리로 새롭게 살아났는데, 해설과 일인다역을 오가는 그녀의 연기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흡입력을 느끼게 했다. 작창에 있어서도 전통 판소리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동시대 음악극으로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줬다는 점이 독창적인데, 휘몰이부터 진양까지 다양한 장단이 상황과 캐릭터에 맞도록 유기적으로 활용돼 극적인 완성도와 대중성을 더했다.

예를 들어 필경사들이 필사를 하고 과자를 먹는 등의 사무실 풍경은 ‘사각 사각’ ‘와삭 와삭’ 같은 의성어로부터 자진모리로 익살스럽게 전환되고, 변호사가 말을 타는 장면은 ‘다그닥 다그닥’에서 휘몰이로 진행돼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사무실에서 바틀비의 흔적을 바라보는 변호사의 복잡한 심경은 느린 진양조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변호사가 스스로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노래에는 서양음악의 요소들이 절충돼 있다. 이처럼 대사와 음악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는 흡사 매끄러운 뮤지컬을 보는 느낌을 준다. 고수 김성근이 북, 아쟁뿐 아니라 정주, 카오벨 같은 특수타악기들을 상당한 실력으로 모두 연주했고, 배우 강필석이 간간이 목소리 출연을 하여 원작 소설의 일부분을 또렷하게 들려줬다.

‘판소리 필경사 바틀비’는 2016년 초연 이후 관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여러 차례 재공연됐다. 이번에는 ‘2020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일환으로 무대에 올랐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19일 온라인 송출됐다. 섬세한 촬영으로 소리꾼 박인혜의 연기와 시청각적 이미지의 전달이 잘 되었지만, 곧 다시 공연장에서 만나게 되길 고대한다.

/현수정 공연평론가(중앙대 연극학과 겸임교수)


현수정 공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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